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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산
높이 832m. 경원선 철도가 휴전선에 막혀 멈춘 곳에 솟아 올라와 있는 광주산맥의 지맥, 국토의 혈맥이다.
경기도 최북단인 연천군 신서면과 강원도 철원군 사이에 있는 고대산 정상에서는 북녘의 철원평야와 6.25 때 격전지인 백마고지가 보인다.
연천 DMZ 트레일런 51K
끝도 없는 가파른 오르막이다. 고대산이 이리도 거친 산이었던가.
처음 스타트하고 앞에서 헤아린 여성주자는 대략 너댓 명, 100K 주자하고 섞여 있으니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코모가 50K 주자 중에서 몇 번째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고도 600미터 부근에서 선두권 여자 한 명을 따라잡는다. 마음 같아서는 뛰어서 몇 명 더 제치고 싶은데 바로 뒤에서 들리는 코모의 거친 숨소리가 발을 늦추게 한다.
이제 약 고도 200미터만 더 올라가면 내리막, 거기서 1차 승부를 걸자.
선두권 경쟁이 치열하다. 물 마실 시간도, 잠시라도 속도를 늦출 수도 없다. 걸어 올라가는 것이 걷는 것이 아니다. 가파른 오르막을 거의 속보 수준으로 올라간다. 조금이라도 경사가 느슨해지면 바로 뛰는 것이 다들 아무 말없이 서로의 숨소리만 고르고 있다.
선수들의 거친 호흡소리가 산 속을 가득 메운다. 다들 필사적으로 죽기 살기 아니면 까무라치기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오르막을 올라간다. 가까스로 선두권 여자 한 명을 제쳤다. 코모도 내 뒤에 바짝 붙는다. 이제 여자 선두 세 번째 아니면 네 번째다.
곧 있으면 바로 위가 고대산 정상이다.
거의 정상에 다 왔다 싶은데 뒤에서 미국 아가씨 한 명이 인기척도 없이 쉭 하고 코모와 나를 앞지른다.
뒤에 바짝 붙어서 보니 어제 32킬로미터 구간 1위를 했던 100킬로미터 참가 선수다. 키나 몸새가 코모만 한데 이건 거의 날아가는 수준이다.
고대산 정상의 절경을 맛볼 틈도 없이 내리막을 쏜다. 내리막에 자신 있는 코모와 나임에도 미국선수를 제칠 수가 없다.
몇 번 앞지를 순간이 있었지만 내리막에 위험해서 포기하고 미국선수 뒤를 그냥 따라가는데 순간 내 뒤에서 악 하는 소리가 난다.
코모가 자갈 내리막에서 미끄러지면서 팔로 지탱했는데 손목이 꺾였다. 부상 정도를 파악해야 하나 뒤에서 맹렬하게 추격해오는 선수들이 있어 그냥 내리 간다. 미국선수는 이제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다.
조금 있으면 11킬로미터 지점 CP1이다. 뒤에 붙인 배번호가 한쪽이 떨어져 달랑 달랑거리는 것이 무척이나 신경이 쓰인다.
이제 가파른 내리막도 끝이 나고 완만하고 지리한 내리막과 오르막 임도길이다. 선수들도 고도 800미터 고대산을 뛰어 넘어오면서 다들 지쳤는지 걷다 뛰다 한다. 미국선수 외에 아직까지 우리를 앞서나간 여자 선수는 없다.
그런데 어, 앞에 낯익은 뒷 모습이 보인다. 어제 32킬로미터 구간 3위를 했던 보영씨다. 완만한 오르막에서 살살 뛰어서 제치고 간다. 보영씨의 놀라는 얼굴표정이 역력하다.
한참 가다가 걷고 있는데 이번엔 보영씨가 우리를 제친다. 코모가 보영씨 뒤에 붙어 뛴다.
이제 11킬로미터 다 왔다 싶더니 앞에 CP1이다.
보영씨, 코모 그리고 내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배낭을 벗어 뒤에 달랑거리는 배번호를 떼어 버리고 비어진 물통을 채우려 하는데 보영씨가 1분도 안 있어 바로 출발한다. 코모와 눈이 마주치고 금방 따라갈 테니 먼저 출발하라고 했다.
보영씨 뒤를 바짝 붙어 뛰어가는 코모의 뒷모습이 금방 조그마해진다. 그 모습이 대회에서 내가 본 마지막이 될 줄이야.
스탭에게 앞에 여자 몇 명 출발했냐고 물어보니 세 명이라고 답한다. 그러면 미국선수와 보영씨 그리고 코모, 50킬로미터 부분에서는 현재 코모가 선두로구나.
몇 분 안 있어서 나도 출발, 코모를 따라잡기 위해 뛰는데 아무리 뛰어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내가 퍼졌다.
12시가 다가오면서 태양이 머리 위에 서있다. 땡볕과 무더위에 약한 나로써는 최악의 조건이다. 아니 이제 오분의 일 온 건데 어찌하란 말이냐.
온 몸에 힘이 없다. 뛰다걷다 이건 체면이 말이 아니다. 기다시피 27킬로미터 지점 CP2에 도착했더니 봉구니가 있다.
이야 봉구니 열라 잘 달리네. 형님 왜 혼자 있어요? 코모 페메하다가 내가 퍼졌어.
같이 가자는데 난 이제 멘탈이 붕괴되어 못 간다고 하고 코모 물어보길래 지금 선두권이고 아마 내 생각에 2킬로미터 차이나는 것 같다고 하니 따라잡겠다고 뛰어 간다.
그래 가서 나대신 같이 뛰어줘라.
한참 쉬다가 출발하고 몇 킬로미터 안 지나 이오형아가 카톡에 CP2 도착했다고 알려왔다. 탄젤이랑 같이 있단다. 별로 차이 안 나네 이오형 대박.
이제 CP3까지는 9킬로미터 남았고, 거기서 결승점까지는 14킬로미터 도합 23킬로미터가 남았는데 이거 포기해야 하나 기어서라도 가야 하나. 체력도 방전이지만 무엇보다도 멘탈이 실종이 되어 뛸 수가 없다. 에이 그래도 가자 완주는 해야지. 코모는 잘 가고 있을라나.
임도길이 수풀에 덮여있고 수풀 바닥에는 자갈들이 있어 자칫하다가는 발목이 돌아가기 십상이다. 조금만 속도를 늦출라치면 뒷 주자가 나를 추월한다.
CP2 이후 셀 수도 없는 주자가 나를 앞질러 간다. 가라 가 난 이제 속도 못 낸다 젠장. 내가 다시는 트레일런 안 한다. 이게 무슨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머리 속에 온갖 잡생각을 하며 온 힘을 짜내 뛰어 보는데 시멘트길이 나오고 이제 CP3가 별로 안 남았다. 뛰자. 무아지경으로 뛰어서 CP3 도착.
형님!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 봉구니야 너 코모 잡겠다더니.
형님 틀렸어요 저 너무 힘들어요 아무래도 8시간 내에 못 들어갈것 같아요.
야, 나는 지금 죽기 일보직전이야.
같이 뛰어요.
난 이제 더 이상 못 가 먼저 가.
등 떠밀 듯이 봉구니를 보내고 CP3 근처 뒤에 돌아가서 배낭 벗어던지고 대자로 누웠다.
이제 14킬로미터 남았는데 가느냐 마느냐. 아놔 이게 무슨 쪽이냐. 페메해서 여자1등 만들겠다고 동네방네 떠들어 놓고는 내가 퍼졌으니.
지금 몇 시냐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8시에 출발했으니 지금까지 6시간을 달려온 셈이다.
8시간 이내에 들어 갈려면 앞으로 2시간 이내에 14킬로미터를 이동하면 된다. 계속 임도일거라 보면 평균 9분 페이스면 126분, 아슬아슬하다.
그래 8시간 이내라도 들어가서 체면을 차려야지. 가자 14킬로미터면 평소 조깅하는 거리다.
수박을 게걸스럽게 먹고 나서는 스탭에게 부탁해서 온 몸에 차가운 물을 몇 번이고 쏟아 부었더니 기운이 좀 나는 듯 하다.
잠깐 고심하다가 준비한 진통제 한 알을 먹었다. 스테로이드 성분이 있어서 도핑검사하면 난 완주해도 탈락되겠지 속으로 별의 별 생각을 다하며 출발.
이제 남은 거리를 걷지 않고 뛰어서 간다. 속으로 결심에 결심을 하며 홀로 비장감을 가슴에 품고 출발한다.
오르막은 조깅, 평지와내리막은 속도를 살짝 높여 본다. 약발이 들었나 속도가 제법 난다. 이제껏 나를 추월했던 주자들을 한 명 한 명 제쳐 나간다.
약 40여 킬로미터 지점에서 봉구니를 또 만났다. 얼굴색이 창백하다.
형 저 두 번 토했어요, 소화가 안돼서 소화제도 먹었는데 저 틀린 것 같아요, 먼저 가세요.
무슨 소리야 같이 가자 살살 뛰어 보자고, 진통제 하나 먹어 보자 약발이 먹힐거야.
몇 킬로미터 동반주하는데 달리는 자세가 이미 힘들어 보인다.
봉구니가 제발 먼저 가달라고 부탁을 한다.
알겠다고 혹시 모르니 안 먹더라도 가지고 있으라고 진통제 한 알을 더 주고 나는 다시 달려 나간다.
이제 계속 임도길이다. 오르막 내리막 가릴 것 없이 막판 스퍼트를 해본다. 이제 십 여 킬로미터 가다가 고꾸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전력을 다 한다. 추월을 안 당하기 위해 가끔 선수들이 속도를 내 보지만 워낙 내가 속도를 내니 뒤따라 오다가 포기한다.
수 십 명은 앞질렀을까? 시간을 계산해 보니 이 정도라면 7시간 40분 안쪽에도 가능하겠다 싶다.
45킬로미터 지점 간이 CP가 보이고 모퉁이를 돌아서니 갑자기 거치른 오르막이 있다.
이런 젠장. 계산이 틀려지잖아. 기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 기어가자. 훨씬 편하다. 1킬로미터 정도 올라가니 배번 검사를 하고 그리고 나서는 다시 내리막이다.
막판 5킬로미터, 자갈밭에 발목이 획획 돌아가면서도 죽을 힘을 다해 달린다.
페이스를 보니 4분대도 나온다.
50킬로미터가 넘었는데 아직 대회장이 안 보인다.
이럴 줄 알았어 거리가 더 길잖아.
그래도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 51.36킬로미터.
결승점에서 한 손을 들어 골인한다. 기록은 7시간 58분. 가까스로 8시간 안에 들어왔다.
풀그림형이 보인다.
코모는?
여성부 1등했어.
그렇구나, 대단하다.
여성부 시상식에 오른 코모가 참 대단하다. 우승기록은 6시간 50분대, 작년 기록을 갈아 치웠다. 45킬로미터 지점에서 2위를 제쳤다고 했다. 작년 우승자는 이번에 코모에 밀려 3위를 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계속되는 인터뷰와 사진촬영. 코모 바쁘네.
얼마 있어 봉구니가 들어오고, 이오형님이 들어오고, 탄젤도, 시속, 얼왕형님, 동윤이, 컷오프 몇 십분을 남기고 하늘과 푸른발님이 들어오고 우리는 단체사진을 찍으면서 그렇게 연천 DMZ 트레일런50K를 마무리 지었다.
내년에 다시 뛰라면 뛸 수 있을까? 글쎄? 그건 며칠 지나 생각해 봐야겠다. 지금 생각은 트레일런의 트 자도 생각하기 싫으니까.
추억을 공유한 모든 카페 식구들 사랑합니다.
핸드폰으로 글 쓰다가 길어져서 컴퓨터를 켜고 다시 갈겨 쓴 대회일지 이 또한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