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6월 4일 토요일, 일곱 번째
21:30 산 속이라 그런 건지 헤드랜턴에 날파리가 엄청나다. 입 속으로 코 속으로 날파리가 들어오는 것이 난리도 아니다. 날파리를 내치기 위해 팔을 계속 휘두르며 가다가 문득 랜턴 불빛에 비친 내 팔의 그림자에 내가 놀란다.
21:35 내리막이 끝났나 싶더니 앞에 왠 큰 건물이 떡 하니 서있다. 아니 이런 산길에 왠 건물이?
고개를 들어 보니 건물 맨 위에 십자가가 달려 있다. 아, 교회인가 보다. 이런 외딴 산 속에 교회가 있다니 괜히 무섭다.
교회를 끼고 좀 더 내려가니 다시 마을이다. 산 속도 마을도 조용한 건 매한가지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을 지나는 것만 같다. 마을 앞에 큰 바위가 있어 헤드랜턴으로 비춰보니 신평마을이라고 새겨져 있다.
21:52 마음은 저 멀리 뛰어가고 있는데 현실은 양쪽 다리를 질질 끌고 가는 신세다. 이제 뛰는 건 불가능하다. 걷는 것도 속도가 안 난다.
마을 골목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이쯤 왔으면 도로를 만나야 하는데 이상하다 싶은 마음이 들어다시 GPS로 확인하니 방향은 맞다.
아, 저기 저 멀리 지평선에 불빛이 길게 늘어뜨려 있는 것이 아마도 도시의 불빛 같다. 방향이 확실하다면 저기가 익산 도심이리라. 경험상 저 정도 가시거리면 이제 약 5킬로미터 남짓 남았다.
21:57 마을 중심 정도 왔나 싶은데 어라 길이 막혔다. 어떻게 된 거지?
두리번두리번거리는데 집 사이에 좁은 샛길이 하나 보인다. 샛길로 들어가려 하는 순간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마을에 울러 퍼지기 시작했다.
순간 적막하기만 하던 마을이 깨어났다. 어찌나 놀랐는지 발이 아픈 것도 잊고 달렸다. 그런데 개 짖는 소리가 멀어지기는커녕 점점 커진다. 한 두 마리가 아니고 이건 개 떼가 울부짖는 소리다. 느낌에 수 백 마리는 족히 짖는 것만 같다. 이 마을에 개 사육장이 있던지 아니면 개들만의 마을임이 틀림없다. 묶여 있거나 가둬져 있을 텐데도 소리가 너무 크니까 마치 달려들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마을의 모든 개들이 짖기 시작하니 조용하던 마을이 깨어나 술렁거린다. 개들만 사는 마을에 내가 무단 침입이라도 한 건가.
개 짖는 소리 반대방향으로 저 멀리 도심의 불빛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린다. 달리다 보니 논두렁 길로 접어 들었다. 여긴 가로등 하나 없다. 소리는 조금씩 잦아들었다. 다행이다. 하지만 달리는 걸 멈추니 발바닥과 발목 통증이 폐부로 심장으로 쓰나미처럼 밀려 온다. 참을 수 없는 고통스러움에 앙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걸으나 뛰나 똑같이 고통스럽다면 차라리 뛰리라.
22:05 논두렁길이 처음에는 널찍하더니 가면 갈수록 좁아지다가 종국에는 수풀로 휩싸인다. 막대기를 찾아서 수풀을 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수풀 속에서 헤어나오니 바로 저기 도심 불빛이 보인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다. 이제 고지가 멀지 않았는데 이 놈의 발목은 디딜 때마다 고통을 호소한다. 이러다 발목이 작살날 것 같다. 젠장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걷기 시작하면 언제 도심에 도착할지 모른다. 몇 킬로미터 안 남았는데 죽어도 뛰다가 죽자. 발목 인대가 끊어지든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든 에라 모르겠다 이것도 내 운이다.
22:15 무아지경으로 달리고 있는데 순간 지면이 미끈거린다는 느낌과 동시에 몸이 붕 떴다. 이런, 소 똥을 제대로 밟았다. 그런데 예상보다 체공시간이 길다. 바닥이 아닌 곳에 떨어진다는 느낌.
그 짧은 순간 지난 과거 한 장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제길 머리 속에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상영이 되면 죽을 때라는데.
스스로 가입한 보험의 사망보장금액을 확인한 12년 전 그 날, 새벽에 나는 도로에 쌓여가는 흰 눈을 밟으며 어디론가 걷고 있다. 하늘에서 눈송이가 천천히 내려 오던 날이었다.
한강에 빠지자. 그렇게 생을 마감하자.
길가에 소복이 쌓인 눈은 가로등불에 비춰 더 하얗게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걷다 보니 몸이 오돌오돌 떨린다. 물에 빠져 죽기 전에 얼어 죽겠다. 너무 추워 뛰었다.
저 멀리 한강대교가 보인다. 십 여분 뛰었을 뿐인데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턱턱 막힌다. 다리 위로 올라가니 강바람이 엄청 나다. 다리 중간까지 걸어가는 동안 만감이 교차한다.
엄마, 아버지, 나의 아이, 아내, 내 친척들, 친구들, 동료들과 고객들, 내가 살아온 인생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제 모두 안녕이다. 난 이젠 쉴 꺼야. 모두 잘 있어라.
걸어가는데 저 다리 가운데에 하얀 점이 보인다. 가까이 가면 갈 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이 사람의 형체다. 어떻게 보면 어린아이 같기도 하다. 누굴까?
'국토를달리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46. [4일차⑨ 전북익산] 그래 그 때 나는 한번 죽은 거다 (4) | 2017.04.09 |
---|---|
45. [4일차⑧ 전북익산] 한걸음 옮기는 시간이 영겁의 세월처럼 느껴진다 (2) | 2017.04.09 |
43. [4일차⑥ 전북익산함열읍] 왠지 같은 장소를 빙빙 도는 듯한 느낌이 든다. (6) | 2017.04.08 |
42. [4일차⑤ 전북익산함열읍] 이런 깡촌에서 야간주는 죽기를 각오해야 한다. (4) | 2017.04.08 |
41. [4일차④ 충남논산강경읍] 이제 전북 익산으로 (0) | 2017.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