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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7일 금요일, 세 번째
16:51 정동진 도착. 여기가 모래시계로 유명한 정동진인가? 사실 처음 와 본다.
시속방장은 여기서 서울로 간다고 한다.
18:10 시속아우가 저녁 6시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고 최강사와 한주가 남았다. 남은 세 명은 이제 강릉시로 이동한다.
18킬로미터 남았다. 시간을 보아하니 꼼짝없이 야간주를 하게 생겼다. 야간 동반주는 처음이다. 그래 국토일주는 야간주를 해야 제대로 된 국토일주 동반주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한주가 버틸 수 있을까?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야간 이동은 실제로 정말 어렵다. 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세계다. 체력이 완전히 방전된 상태에서 사방이 어둡고 사람은 없고 차만 지나가고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는 순간이 오면 그야말로 멘붕이 되는 느낌은 한 마디로 처절하다.
18:43 우선 내가 끝까지 괜찮아야 이 두 명을 이끌어 나갈 텐데 어디가 어떻게 부상이 도질지 가슴이 조마 조마 하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가 오른쪽 아킬레스건에 염증이 도졌다. 쩔뚝거리며 간다.
먼 하늘에 붉은 기운이 감돈다. 어둠이 오고 있다. 계속 절뚝절뚝, 한주도 절뚝절뚝, 하지만 난 전라도도 이렇게 며칠을 절뚝거리며 통과했다.
갈림길이 나왔다. 지도앱을 보고 머리 속에서 시뮬레이션해보니 국도를 따라가기 보다는 가로질러 시간을 단축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국도는 너무 돈다. 빙 돌다가 국도에서 어둠을 맞이하면 윙윙거리는 자동차 소리에 다들 위축되어 이동이 불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차라리 산을 타고 넘는 것이 낫다. 거리상 어둠이 오기 전에 이 정도 산은 타고 넘을 수 있다. 넘고 나서 시골길 어둠은 괜찮다. 견딜 수 있을 것이다. 혼자였으면 어쩌면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을 수도 있지만 산 타는 길은 여럿이니 괜찮다.
19:12 산속이라 그런가 짖어대는 개들이 많다. 한주가 등 뒤에 바짝 붙는다. 최강사도 한주도 나도 모두 아무 말없이 묵묵히 걷고만 있다. 날은 어두워 오는데 힘들 것이다. 특히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 한주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금방이라도 고꾸라 질 것 같다. 반면 최강사의 컨디션은 좋아 보인다. 믿고 간다. 최강사 아니었으면 저번 9일차 한주와의 동반주 때처럼 콜택시를 불르는 것도 감안했을 것이다.
19:35 산길을 타고 넘는데 내가 죽겠다. 역시 어제 60킬로미터 이상을 내리 달리고 오늘 또 60킬로미터 이상을 이동한다는 것이 무리였다.이제까지 축적된 피로도가 쌓여 급격한 체력저하를 가져오는 것 같다. 오른쪽 아킬레스건이 찢겨져 버리는 것 같다.
결국 시골길 중간에서 내가 퍼졌다. 잠시 앉았는데 일어나질 못하겠다.
최강사가 형님, 택시 부를까요 물어보길래 됐다고 끝까지 가자고 했다.
20:10 이제 강릉시까지 10여킬로미터 남았다. 이제 겨우 8킬로미터 온 셈인가? 시계가 저녁 8시 10분을 가리키고 아니나 다를까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에 어둠이 짙게 깔린다.
최강사가 형님, 랜턴켜야겠는데요 말하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최강사가 국토일주 출정식 때 선물해 준 야광밴드 세 개를 꺼내 각자 하나씩 나눠주고 헤드랜턴을 켰다. 최강사가핸드폰으로 네비게이션을 켜고 길을 찾아 나서면 한주와 나는 그 뒤를 묵묵히 따르는 상황이다. 최강사가 비장한 모습으로어둠을 헤치며 앞장선다. 가끔 길을 잘못들라치면 막 뛰어다니며 길을 찾는다.
21:15 막힌 길이 많다. 어둠 속에서 한참을 가다 보니국도를 타게 됐다. 차들이 엄청 쌩쌩 달린다. 내가 국도를 빠르게 통과하자고 제안했다. 최강사는 앞에 샛길로 빠질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알아보겠다며 앞으로 달려 나간다. 나와 한주도 뛴다. 어두운 국도를 다리를 질질 끌며 한 2킬로미터는 뛰었을까? 어느덧 도심에 들어섰나보다. 차도 옆에 인도가 나타났다. 오, 하나님.
한주가 대단하다. 발바닥 전체에 물집인데 어떻게 여기까지 참고 왔을까? 터뜨리고 가자고 해도 말을 안듣는다. 잠깐 쉴 때도 안 앉는다. 앉으면 다시 일어설 수 없단다. 나 역시 몸 상태는 이제 바닥이다. 하지만 정신은 말짱하다. 사실 벌써 이보다 더 험한 상황을 십여차례 혼자서 겪어 왔었다.
최강사와 한주가 오늘 강릉시 도착하면 막차타고 집으로 가겠다고 한다. 이 상태로 찜질방에서 자고 내일까지 동반주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말한다. 그래 그럴 것이다.
최강사가 나한테 물어 본다.
어떻게 이렇게 매일 이동할 수 있어요?
어떻게 이동을 해 그냥 하는거지.
21:35 긴장을 풀어준답시고 강릉 도심까지 이동하면서 혼자서 계속 떠들며 왔다. 내용이야 뻔히 국토일주 무용담이다. 고맙게도 아우들이 귀기울여 들어준다. 그렇게 강릉도심에 들어왔다. 지도 앱을 보니 강릉터미날까지 이제 약 2킬로미터 남짓 남았을까?
어라, 그런데 갑자기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한주가 앞서 나가는 최강사를 큰소리로 부르고 최강사가 다시 돌아서 뛰어온다.
힘겹게 말했다.
난 이제 더이상 못가니 둘이 택시타고 빨리 터미날가서 막차타고 서울 가라고, 나는 이 근처 어디 여관찾아 누워야겠다고 했다. 안쓰러워 못떠나는 아우들을 쫓아버리고난 아예 길바닥에 들어누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주변이 고요해 진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천천히 돌아 간다. 국토일주 동안 힘들 때 내 옆에 오곤 했던 어린아이가 보고 싶다.
몇 년 전 교육에 미쳐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영업과 영업관리만 십 년을 하고 본사에 들어와서 맡은 업무는 영업교육이었다. 교육과 관련된 수 십 권의 서적을 읽는 것도 모자라 고시공부하듯이 암기를 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짜고 진행을 하고 강의를 했다. 교육생들과 동고동락한 시간을 마치고 연수원에서 수료식을 할 때는 벅찬 감동에 같이 울었다. 최고의 강의는 내 입을 통해 그들의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닌 그들이 원하는 내용을 전달하려 했다. 나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수업 내용보다는 같이 참여해서 만들어 가는 롤플레이 형식의 교육방식은 그야말로 교육생들의 심금을 울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나는 진정한 강사인가? 진정한 강사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그러다 나는 득도하듯이 깨달았다. 진정한 강사는 자기가 한 말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니 적어도 자기가 경험하고 뼛속 깊이 깨달은 사실만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의 강의 마무리는 내 안의 어린아이를 꼭 껴안아 주는 것으로 끝맺음을 했다. 하지만 정작 나에게는 안아 줄 내 안의 어린아이가 없었다. 문득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리고는 강의를 접고 나서 1년이 지나, 나는 만났다. 국토일주를 하면서 말이다. 흰 티셔츠를 입은 그 어린아이는 내 안의 어린아이였다.
그동안 소홀해서 미안했어, 그런 나를 용서해줘, 있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아이가 내 손을 잡아 준다. 따뜻하다. 물어 본다.
어디 있다 이제 왔니?
저는 항상 당신 마음 속에 있었어요.
아이의 목소리가 내 안에 잔잔히 퍼져 간다.
22:30 얼마나 지났을까. 시계를 보니 한시간 정도 지난 것 같다. 정신을 잃었나 보다.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려 보지만 어린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 어린아이는 내 안에 있을테지. 주변을 살펴 보니 다행히도 완전 길바닥은 아니고 돌로 된 벤치 위에 누워있다. 그 와중에서도 누울 데를 찾았었나 보다. 다리를 움직여 보니앉아 있을 수는 있을 정도가 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태엽이 풀린 인형처럼 몸과 정신이 한꺼번에 나가버릴 수 있을까.
앉아서 한참을 더 쉬고 있다가 주변에 잘 데가 있나 봤더니 저기 골목 건너 여관 간판이 보인다. 3층이다.
아픈 발목 질질 끌고 올라갔더니 보면 모르냐는 식의 대답이 돌아 온다.
제길, 좀 친절하면 어디가 덧나나. 다시 내려와 양쪽 다리를 질질 끌며 골목으로 들었더니 어떤 인상좋은 아주머니 한분이 잘 데 찾냐며 안내를 해준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따라간다. 여관까지의 그 몇 걸음 안 되는 거리가 광년(光年)은 떨어진 안드로메다 별나라 가는 것 같다.
눈꺼풀에 코끼리가 매달려 있는 듯 무겁기만 하다. 눕자마자 바로 곯아 떨어질 기세다.
23:42 방에 들어 가자 마자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천장이 빙글 빙글 돈다. 잠은 바로 안오는데 몸은 침대 깊은 곳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불을 끄고 자야지 마음은 굴뚝같은데 몸이 안움직여진다.
닫힌 눈꺼풀 위로 밝은 형광등 불빛이 깜박이며 환영들이 스쳐지나간다. 어릴 적 살던 집에 내가 있고 집에 있는 나는 지금의 다 큰 내 모습이다. 아니 가만 보니 내가 아니고 지금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아버지다. 아, 아버지…… 그리고 옆에는 그보다 더 젋어 보이는 엄마가 있다. 두 분은 무엇때문인지 격하게 말다툼중이다. 그 안방을 숨어서 몰래 보고 있는 아이가 있다. 그건…… 어렸을 적 나다.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울먹거리던 그 아이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며 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하염없이 뛰어간다. 어린 나는 뛰다가 흰 티셔츠를 입은 어린아이로 변해 버리고 어린아이는 새가 되어 날아간다. 창공을 훨훨 날아간다.
17일차 실제 경로: 강원 삼척시청-동해시청(15km)–강릉시 정동진역(25km)–강릉시청(20km) 총 6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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