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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4일 화요일 다섯번째

 

 

여기서부터는 경상북도 울진군입니다.


16:18 국토종주 동해안자전거길 안내문에 적혀 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 온다. 이제 울진 입성이다.

 

 

내가 내 두 발로 경상북도 울진까지 오다니.

오른쪽에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다. 내가 언제 또 이렇게 바다를 질리도록 보겠는가.

바닷가에는 갈매기들이 사람이 지나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것도 신기하다.

 

 

갈매기를 보며 한참을 사색하며 걸어가다 보니 너무 걸었나 싶어 다시 또 뛰어 본다. 그렇다고 오래 달리지는 못하고 걷가 뛰다 반복이다. 무리하다가 발목 부상이 더 심해지면 국토일주를 접어야 되는 수가 있다. 달리다가 아킬레스건이 조금이라도 시큰거리는 것 같으면 바로 걸으면서 그늘을 찾아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수준이다.

실은 발목에 힘을 못 주니 앞꿈치가 아닌 뒤꿈치로 착지를 하게 되고 반동을 못 주니 충격을 그대로 흡수해서 다시 발목에 무리를 주게 되는 악순환의 반복이다.

 

이런 개고생을 왜 사서 하냐고 물어 볼라치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본인이 한 번 해보기 전에는 이런 행복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극한의 몸 상태에서 대한민국 동해안의 절경을 하루 종일 느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신기한 건 내가 벌써 이렇게 계속 이동하고 있는데 발목을 제외하고 몸은 지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문득 국토일주 2일차 때 풀그림님의 한 말이 생각났다.

 

신병교육대를 들어가면 딱 14일째에 몸이 적응이 되거든. 그 전까지는 죽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14일이 되면 원래 그랬다는 듯이 그렇게 살게 되는 거야. 참 신기하지?’

 

정말 적응이 된 것인가?

 

 

17:32 후포 도착하기 직전 이름 모를 바닷가를 우측에 두고 나무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정자에서 퍼졌다. 퍼졌다고 해도 더 이상 못 갈 정도가 아닌 좀 쉬어야 되는 정도이다.

 

 

이제 평해까지 남은 거리는 약 10여 킬로미터, 오늘 최종 목적지인 기성 망양까지는 25여 킬로미터가 남았다. 제길, 오늘 야간주를 할 것이냐 갈 때까지 가다가 쉴 것이냐.

어제 경로 하나가 밀린 것이 계속 부담으로 가슴 한 켠에 짐이 되고 있다.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눈 좀 부치고 가기로 했다. 바다바람이 산들산들 부는 것이 잠자기엔 아주 딱 이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정자 위에 누우니 이건 뭐 천국이 따로 없다. 30분만 누웠다가 일어나서 얼마나 더 갈지 결정하자.

기분 좋은 졸음이 쏟아진다. 눈거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본다. 이상하다. 통장에 찍힌 숫자가 173만원? 지난 한 달 내 영업실적 개인기록을 세우면서 이번 달에 꽤 많은 급여가 나오리라 기대했는데 맥이 풀린다. 마라톤을 시작하면서 영업 또한 물이 오른지 1년여가 지났다. 이번에도 급여가 높지 않으면 그만 두리라고 다짐했다.

아내에게는 뭐라고 하지?

문득 혹시라는 생각에 다시 통장을 열어서 검지 끝으로 자리수를 꼭꼭 눌러가며 다시 세어 본다.

일십백천만…… ! 이거 1730만원 아냐?

집 근처 은행에 들려 여직원에게 만 원권으로 다 찾아달라고 하고 나서는 준비해 간 가방에 넣었다. 집까지 가는 그 십여 분 동안 웃음이 터지는 것을 참느라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다.

집에 가서 심각한 표정으로아내 손을 잡고 방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말없이 가방에 손을 넣어서 만 원권 지폐를 한 움큼 집어 위로 뿌렸다. 그리고 또 집어서 뿌렸다. 계속 뿌렸다. 아예 가방을 거꾸로 들어서 안방 침대 위에 쏟아 부었다. 아내의 휘둥그레진 눈에 이내 물기가 고여 떨어졌다.

 

18:02 아차, 살짝 잠이 들었다. 십 년도 더 된 예전 일들이 꿈 속에서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마라톤을 시작하고 1년 간 몸만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회사에서 영업실적도 가속페달을 밟은 경주용차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영업에 대해 상품에 대해 고객에 대해 마치 고시를 준비하듯이 파고 들었고 마지막까지 악착같이 매달렸다. 절대 성급하지 않게 외부 영향에 휘둘리지 않고 목표한 대로 한걸음 한걸음 묵묵히 모든 일에 치밀하게 전략을 세워서 하나씩 성취해 나갔다. 몇 개월 더 지나 실적은 수직 상승을 했고 급여는 수 천만 원을 넘어서 그 해 나는 분기 챔피언을 거머쥐었다. 남들 눈에는 기적이었고 나에게는 노력의 결실이었다.

십여 년 지나 작년에 나는 이러한 인생역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서는 용기>란 제목의 소설을 하나 썼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결과의 씨앗은 마라톤이었다. 그래, 그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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