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6월 1일 수요일, 여섯 번째
18:55 산업단지 길을 벗어나 국도로 접어 들었다. 시간은 어느덧 흘러 벌써 저녁 7시가 되어 간다. 주변이 어둑해져 온다. 체력이 방전된 상태에서 어두워지니까 겁이 난다. 걸으면서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다리며 허리며 몸 전체의 근육이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궁둥이 사이에 끼웠던 휴지덩어리는 고정이 안돼서 팬티 안에서 돌아다닌다. 5킬로그램의 조끼배낭은 왜 이렇게 무겁게만 느껴지는지. 게다가 국도를 달리는 차들의 속도가 장난 아니다. 도로의 갓길로 이동할 때는 차 오는 걸 마주보고 가라 했는데 맞은 편 갓길은 너무 좁아 보여서 그냥 차를 등지고 계속 달린다.
20:15 순간 좀 어두워 진다 싶더니 갑자기 온 세상에 정전이 난 듯 캄캄해 진다. 시계를 보니 저녁 8시 15분이다. 도심이 아니다 보니 해가 지는 것과 동시에 어둠이 도로 전체를 장악해 버린다. 차들은 어둠 속에서 더 속도를 내는 것 같다. 간혹 지나가는 차의 헤드라이트만이 반짝하고 주변을 밝혔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반복된다.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배낭을 풀러 야간주 복장으로 환복했다. 헤드랜턴을 착용하고 팔목과 배낭끈에 야광밴드를 고정한 후 야광조끼를 입고는 도로 갓길로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앞쪽에 직경 약 2미터 남짓 되는 하얀 원이 나를 이끈다. 궁둥이 사이 살이 쓰리건 따갑건 달렸다. 몸 전체 있는 글리코겐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어 계속해서 달렸다. 본능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절박함이 극한의 체력을 끌어 내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순간 카타르시스가 온 몸을 휘감는다. 마치 마라톤 풀코스 그 42.195킬로미터 레이스를 처절하게 달리다 보면 극한의 순간 몽롱하게 느끼는 러너스하이*, 바로 그 느낌이다.
주변이 시끄럽다.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면서 눈 앞에 잠실대로에 꽉 찬 마라토너들의 도열이 펼쳐진다. 아, 여긴 어디인가? 여기는 10년 전 중앙서울마라톤*대회장이다. 나는 지금 서울 한복판에 서 있다.
2005년 11월 6일 08:50 중앙서울마라톤대회. 잠실대로는 수만 명의 열기로 11월의 한기를 녹이고 있다. 머리 속으로는 계속 페이스차트를 떠올리며 마인드컨트롤을 하고 있다. 갑자기 앞에서 폭죽이 올라간다. 등록선수들 출발인가 보다. 이어 A그룹이 출발하고 얼마 있다가 B그룹, 그리고 내가 속한 C그룹이 출발한다. 앞에 사람들이 너무 많다. 처음 1킬로미터 페이스가 4분 40초다. 너무 지체했다. 옆으로 빠져서 속도를 내본다. 이런, 2킬로미터 지점에서 페이스는 3분 50초, 너무 빨라졌다. 페이스가 잡히지 않는다. 평정심을 찾아야 한다.
올림픽공원역을 지나가면서 왼쪽 발목에 경미한 통증이 감지된다. 항상 고질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던 오른쪽 무릎은 오늘따라 착하다. 조금 더 가면 10키로 지점인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떻게 하나. 경량화를 신고 도로주 훈련을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페이스는 4분10초에서 4분 20초를 넘나 들고 있다. 내 스피드만 생각한다면 내심 서브쓰리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무아지경이다. 훈련한데로 흐름에 맡긴다. 아직까지 괜찮다. 스피드도 이 상태로 유지한다. 이 자세 이 스피드로 끝까지 갈 수 있다면.
어느덧 레이스 절반이 지나고 있다. 반환점을 지나면서 출발부터 같이 달리던 주자 한 명이 조금씩 치고 나간다. 바로 따라붙지 않고 3미터 범위 내에서 달리며 조금씩 옆으로 붙었다. 이제는 내가 인터벌을 해 본다. 몇 백 미터를 꾸준히 치고 나가니 잠시 호흡소리가 멀어졌다가 속도를 늦추니 이내 따라 붙는다. 짧은 회복을 한 후 두 번째로 치고 나간다. 조금 더 속도를 내 본다. 방금 전보다 더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나도 비슷했지만 내리막 구간을 맞아 페이스를 회복한다. 어느 순간 호흡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뒤를 돌아 보니 5미터 이상 떨어졌다. 페이스는 여전히 4분 20초대. 이대로만 가자. 조금만 더 가면 30키로 지점이다. 하지만 숨이 턱에 차오른다. 온 몸의 글리코겐이 고갈되는 느낌이다. 이렇게 얼마다 더 갈 수 있을까?
빠앙. 주로 옆 인도에서 뿜어 나오는 나팔소리에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응원 나팔소리인가?
20:45 하마터면 큰 일 날뻔했다. 시커먼 대형트럭 한 대가 경적소리를 뿜어내며 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이런 미친! 달리면서 깜박 졸았나 보다. 부딪히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무아지경으로 달리다 보니 현재의 내가 과거로 돌아가 달리다가 왔다. 10년 전 그 날 치열하게 처절하게 달리던 기억이 또렷하다. 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달렸을까? 도대체 무엇이 나를 그토록 달리게 만들었을까.나에게 마라톤은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21:11 저 멀리 도심의 불빛이 보인다. 평택시 안중읍이다.
살았다. 그래 드디어 국토일주 1일차 목표로 한 70킬로미터 미션은 완수했다. 긴장이 풀리니 다리 전체 아니 몸 전체에 근육통이 쓰나미처럼 밀려 온다.도심 중앙까지 못 가고 도로 근처 제일 먼저 보이는 모텔로 들어갔다. 배에 붙어 있는 부착물을 본 데스크 여직원은 고맙게도 가장 저렴한 방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21:45 방문을 열고 신발을 벗고 배낭을 풀러 탁자 위에 놓은 다음 옷 입은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가만히 누워 있는데도 발바닥과 발목 그리고 종아리 전체에 전기가 흐르듯 진통이 느껴진다. 그래도 씻고는 자야지 싶어서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옷을 벗고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궁둥이 사이 살이 너무 쓰리다. 겨우 겨우 씻고 나왔다. 휴지로 대보았는데 피가 묻어 나오지 않는 거 보니 예상컨데 까지진 않고 벌겋게 부은 정도인 것 같다.
핸드폰과 예비배터리, 러닝시계를 충전기에 연결하고 침대에 누워 SNS를 확인해보니 국토일주 게시글에 많은 응원 댓글이 달려있다. 그래 힘을 내자. 핸드폰에 오늘 있었던 일들 몇 꼭지 정리해 놓고 팔굽혀 펴기를 하려 하니 힘이 없다. 그건 내일부터 하자. 그래 이게 습관을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은 거야.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자니힘들었던 오늘 하루가 머리 속에서 필름이 돌아가듯 스쳐 지나간다.
가장 당황스러웠던 건 길 찾는 것이었다. 지도로 대략 경로를 가늠해 보고 시뮬레이션도 돌려 보았지만 실제는 많이 달랐다. 매번 선택하고 결정해야 했다. 국도로 갈지 빠져서 샛길로 갈지 산을 넘을지 하천을 따라 갈지 돌아갈지 가로질러 갈지. 마라톤 대회처럼 정해져 있는 코스를 달리거나 페이스 메이커가 있어서 따라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닌, 내가 혼자 찾아서 내가 혼자 결정해서 가야 한다.
인생도 선택의 연속이다. 너는 이쪽으로 가라 너는 저쪽으로 가라 정해진 것이 없다. 정해진 길이 없으니 힘든 건 당연하다. 그래서 목표가 있어야 한다. 목표가 없으면 속도가 붙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목표는 계속 바뀔 수 있고 이에 따른 계획도 계속 수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목표이든 계획이든 선택한 길이든 후회하지 말고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에게 깨어나는 아침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우리 인생의 첫 날이니까. 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매일 새로운 날이 온다. 목표를 향해 가는 길은 매번 첫경험이니 불안함도 있지만 반면에 기대와 희망이 있다.
내일 경로를 떠올려 본다. 내일은 충청남도에 입성하는 날이다. 새벽에 출발해서 해가 없을 때 최대한 많이 이동을 하는 거다.
충청남도 아산시 순천향대까지는 30킬로미터 거리이다. 빠르게 가면 오전 9시까지 갈 수 있다. 그리고 뙤약볕을 피해 휴식을 취한 후 해가 떨어진 오후 늦게 출발해서 공주시 유구읍까지 30킬로미터, 총 60킬로미터를 이동하면 미션 완료다. 이렇게 국토일주 첫 날을 마감하는구나. 온 몸의 긴장감이 풀리면서 손발이 저려오는 듯 나른해 진다. 졸립다. 졸음이 밀려온다.
1일차 경로: 서울 신길동–경기도 군포시청(20km)–화성시 봉담읍(20km)–평택시 안중읍(30km) 총 70km
"우리는 때때로 바람을 따라 항해해야 하고, 혹은 바람을 거슬러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항해해야 하며, 표류하거나 정박해서는 안 된다."
올리버 웬델 홈즈 (Oliver Wendell Holmes, 의사, 수필가)
우리 삶에게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어느 곳에 있는가 보다 내가 지금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 이다. 내가 지금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내가 가는 방향을 명확하게 알고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설령 천천히 가더라도 도착하고자 하는 지점으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표를 잃고 방황하거나 그저 멈춰 서버린다면 결코 도착점에 이를 수 을 것이다.
아무리 작은 노력이라도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맞춰서 한발자국 한발자국 꾸준하게 노력한다면,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기 위하여 순간에 집중하고 즐긴다면 어느 순간 원하는 목표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국토를달리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3. [2일차② 경기평택현덕면] 아산만방조제를 도보로 건너다니 (0) | 2017.04.02 |
---|---|
22. [2일차① 경기평택안중읍] 오늘은 60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한다 (2) | 2017.04.02 |
20. [1일차⑤ 경기화성양감면] 피할 수 없으면 즐길 수 밖에 없다 (0) | 2017.03.31 |
19. [1일차④ 경기화성정남면] 낯선 신도시의 느낌이 싱그럽다 (0) | 2017.03.30 |
18. [1일차③ 경기화성봉담읍] 봉담읍 도심에 안착하다 (2) | 2017.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