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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일 수요일, 네 번째

 

11:39 아이들의 환호성 소리에 눈이 떠졌다. 옆에서 아빠와 함께 사우나에 온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보며 큰 소리로 웃고 있는 것이 보인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꿈을 꿔도 달리기 꿈을 꾸다니.

그래, 그 때 학교에서 오래달리기를 했었다. 몸은 약해서 잔병치레를 곧잘 하곤 했지만 오래달리기는 자신 있었다. 달릴 때는 숨이 막히고 다리가 후들거려도 멈추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 때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내가 달리는 행위에서 희열을 느낀다는 것을.

당시 반에서 제일 잘 달린다는 아이를 간만의 차로 이기고 나선 쌕쌕이란 별명이 생겼었다. 그리고는 그 달리는 희열과 느낌을 잊고 있었다. 사회에 나와 쇳 맛나는 몹쓸 병에 걸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11:48 일어나려는데 풀릴 줄 알았던 다리가 오히려 뻣뻣하다. , 이거 왜 이러지 하며 사우나탕에서 조금씩 걸었더니 또 금방 괜찮아진다.

얼른 탕에서 나와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찜질방을 나선다. 평택시까지 반드시 가서 오늘 목표 거리인 70킬로미터를 완주하리라. 시계를 보니 정오가 다 되어 가고 있다. 자 어서 가자.

 

12:00 해가 머리 바로 위에 머물러 있다. 네 장을 마주 이은 하얀 손수건을 꺼내 머리 위에 덮어쓰고 모자를 쓴다. 일명 햇빛 가리개 착용이다. 도로에 있는 원형반사경을 힐끗 보았더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천상 만수르다. 우스꽝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얼굴이 햇볕에 화상입는 것보다는 낫다.

컨디션이 회복된 듯 하여 조금씩 조깅속도로 달려본다. 낯선 신도시의 느낌이 싱그럽다


13:51 갑자기 허기가 진다. 갑자기 몇 년 만에 오래 달리니 체력이 못 버티는 건가.

현 위치를 검색해 보니 화성시 정남면 문학리다. 처음 계획했던 경로하고는 전혀 다른 코스로 이동하고 있다. 경로뿐만이 아니라 시간도 많이 늦어지고 있다. 계획상 지금쯤이면 안중읍에 거의 왔어야 하는데 아직 20여 킬로미터나 남았다. 허기가 진다.

도로 옆 바로 눈에 띄는 중국집에 무작정 들어가서 드러누웠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무척 초췌해 보인다. 사람이 하루 만에 이렇게 남루해 질 수 있구나. 그래 이왕 늦은 거 컨디션 조절하면서 가자. 볶음밥을 시켜서 순식간에 흡입을 하고 한 시간 가량 쉬다가 나왔다.



 

16:00 몇 킬로미터를 달렸을까. 국도를 빠져 나와 하천 길로 이동한다. 논밭을 양쪽으로 바라 보며 한참을 가다 보니 이름 모를 작은 마을로 접어 들었다.

지도를 보니 향남읍 외곽 정도 되는 것 같다. 하천 이름을 검색해 보니 관리천이란다.

봉담읍을 떠난 지 20여 킬로미터 정도, 여기는 완전 깡촌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가게 하나 없고 사람 한 명 지나다니지를 않는다. 그냥 벌판이다. 길가에 알 수 없는 꽃들과 잡초들이 하천과 어우러져 전형적인 시골의 느린 오후 풍경을 자아낸다. 나도 그냥 그런 모습을 감상하며 하천 따라 걷고 또 걷는다.

 

 

차가 지나다닐 일이 없으니 이어폰을 꺼내 핸드폰에 연결해서 노래를 들으며 간다. 주변에 눈을 씻고 보아도 사람 한 명 없다. 논과 밭, 하천과 낮은 산들, 나는 노래에 취해 큰 소리로 따라 불러 본다.

 

 17:05 오후 5시가 넘어가니 옆으로 햇빛을 쏘아내는 해가 갑자기 신경이 쓰인다. 따갑다.

이 놈의 해는 떨어져도 햇빛이 따갑다. 구름 한 점 없는 쪽빛 하늘이다. 햇볕에 좀 뛰었다고 물이 마냥 먹힌다. 벌써 물통의 절반 가량이 비워졌다. 아껴 마셔야 한다. 오늘 최종 목적지인 안중읍까지 가야 급수를 할 수 있다. 조끼배낭 앞쪽 물병에 담겨 있는 물은 뜨거운 뙤약볕에서 마치 중탕(重湯)이라도 한 듯 뜨끈하다. 시원한 냉수를 마시고 싶다. 한번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땡볕에서 한 걸음도 걷기 힘들어 졌다. 정신이 먼저 무너졌다.

 

마을을 지나치는데 개미 한 마리 보이지가 않는다. 사람도 동물도 모든 살아 있는 생물들이 햇볕을 피해 어디론가 다 숨어버린 듯싶다.

나도 더 이상은 못 가겠다. 담벼락이 만들어 낸 그늘을 찾아 기대 누웠다. , 힘들다. 배낭을 풀러 허리 뒤에 받치고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정말 시원한 물 한잔만 마셨으면 소원이 없겠다.

까악 까악, 저기 언덕너머 까치 소리가 들린다. 오늘 보고싶은 사람을 만날려나, 그보다 하늘에서 냉수 한 바가지 똑 떨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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