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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 목요일 여덟번째
정말 걸음아 나 살려라, 숨이 터지도록 달리고 달려 얼마나 질주했을까?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아까 폐가를 찍은 사진을 확인한 순간, 나는 또 한번 기절할 뻔 했다. 창문 너머 보았던 하얀 티셔츠의 어린아이는 사진 속에 없었다.
내가 잘 못 본 걸까? 내가 꿈을 꾼 걸까? 나는 무엇을 본 걸까?
18:34 머리 속에서 어린아이가 떠나지 않는다. 잊고 싶어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달린다. 얼마나 달려왔는지 어느덧 산길을 벗어나는 것 같다. 옆에 저수지 폭은 점점 좁아지고 길이 넓어지면서 계속 내리막길이다. 산 아래 넓은 공터가 있고 끝에 다리가 하나 보이는데 지도를 보니 유곡교다.
아, 살았다. 드디어 저수지를 벗어났다. 다리를 건너는데 그제서야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한다. 다행이다. 산 속에서 어둠을 맞이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기도 끔찍하다. 긴장이 풀리니 발가락이 너무 쓰리다. 못 참을 정도다. 저 멀리 마을이 보인다.
18:45 제일 먼저 보이는 음식점에 들어가서 아무거나 시킨다고 시킨 것이 냉 콩국수를 시켰다. 신발과 양말을 벗으니 살 것 같다. 오른쪽 새끼 발가락은 결국 표피가 벗겨지고 벌건 진피가 드러나 퉁퉁 부어 있다. 어쩐지 그래서 그렇게 쓰라렸었구나.
춥다. 창문 옆에 앉았는데 열어 놓은 창문으로 냉한 산 기운이 전해 온다. 이 추운 날 냉콩국수는 왜 시켰을까? 몸이 오돌 오돌 떨려서 배낭에서 방풍자켓을 꺼내 입으려는 순간 주인 아저씨가 친절한 소리로 더우면 선풍기 틀어 드릴까요 라고 물어 본다. 이 추운데 선풍기라니! 그러고 보니 음식점 다른 사람들은 곳곳에서 불어대는 선풍기 바람에도 더운지 부채질을 하고 있다. 아, 지금 내가 체력이 바닥나 오한이 나고 있구나. 손으로 이마와 목덜미를 만져 보았다. 식은 땀이 나고 있었다.
지도를 꺼내서 현 위치를 파악했다. 아직 송악면이다. 풀그림님하고 헤어지고 나서 몇 시간에 거쳐 겨우 10 여 킬로미터를 이동한 셈이다. 이제 외암로를 따라 약 20여 킬로미터는 더 가야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유구읍이다. 지금 이 속도로라면 4시간은 더 걸릴 것이다. 야간주를 감행한다면 거의 밤 12시나 되어서 도착이다. 게다가 여기서 유구읍까지는 산길이나 다름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안 되겠다. 접자. 오늘은 여기서 묵는다. 아까 그 친절한 주인장 아저씨한테 물어 보았다.
여기 혹시 숙박할 곳이 있을까요?
아저씨 왈 외암마을까지는 가야한단다. 거리가 어느 정도 되냐고 물어 보았더니 송악저수지 오른편으로 5킬로미터를 올라가야 한다고 한다. 미쳤다. 죽어도 난 다시 되돌아 가진 못한다. 유구읍쪽으로는 없냐고 물어 봤더니 없단다,그 쪽으로는유구읍내까지 가야 한단다. 눈 앞이 노래졌다.
아니 그러면 여기는 잘 데가 없는 거에요? 혹시 민박 같은 게 없나요?
옆에 있는 아줌마 한 분이 요 앞에 국도 따라1킬로미터 가면 휴게소가 하나 있는데 거기 가서 물어보면 잘 수도 있을거라고 귀띔해 준다. 감사하다 하고 나섰다.
19:04 절뚝거리며 조금 걸어 가다 보니 휴게소라고 하기엔 좀 허름한 2층짜리 건물이 있고, 1층에는 매점이 있는데건물 왼쪽 모퉁이에 모텔간판이 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입구가 따로 있어 가까이 가보니 무슨 뚱뚱한 검정색 개 한 마리가 올라가는 문 앞에 지키고 앉아 있다. 생긴 거나 몸집을 봤을 때는 새카만 몸에 다리도 짧고 땅딸막한 것이 잡종같아 보이진 않는데 무슨 종인지는 잘 모르겠다. 옆을 지나가도 짖지도 않고 점잖다. 2층으로 올라가 봤더니 천장에 거미줄도 좀 있고 복도에 물건들도 쌓여 있는 것이 관리가 잘 되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제길 어떻게 하나. 일단 매점에 가서 물어나 보자.
매점에는 사람이 꽤 있고 라면 등 간단한 음식도 팔고 있었다. 넉살 좋아 보이는 주인아줌마와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아줌마 그렇게 두 명이 주문도 받고 음식도 하면서 손님을 상대하고 있다. 그냥 물어 보기는 뭐 해서 매대 주위를 빙빙 돌아 보다가 과자 한 봉지하고 빵과 우유 등을 몇 개 골라 계산했다.
아주머니 요 근처에 잘 데 있어요?
주인아줌마는 내 꼬라지를 위아래로 한 번 휙 훑어 보더니 부착물의 문구를 읽었는지 다정한 목소리로 그러엄 우리 여기 2층이 모텔이에요. 학생이 전국일주하나봐? 싸게 해 줄게 여기서 자.
아이고 제가 나이가 몇 갠데 학생이에요. 제가 모자를 써서 그렇지 모자 벗으면 흰머리가 숭숭이에요. 나이가 40대 중반인데.
어머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집에서 뭔 말 안 해요? 총각인가 봐.
아니 애가 중학생이에요.
어휴 정말 그렇게 안 보이네.
주인아줌마는 무료한 저녁 나절 이 휴게소에 새로운 사람이 등장한 걸 반기는 기색이다.
그런데 제가 2층에 올라갔다 왔거든요. 여기 숙박 운영하는 거에요?
그러엄, 우리도 거기서 자고 그래요. 괜찮은 방 안내해 줄게. 근데 어디서 온 거야?
서울이요.
언제부터?
어제 출발했어요.
그렇구나. 근데 자전거는 어디다가 세워놓았어?
이 주인장 아줌마는 내가 나이를 밝혔는데도 계속 반말이다. 그래 지금 그런 거 따질 힘도 없다. 그런데 옆에 서빙하는 젊은 아줌마가 자꾸 나를 흘깃 쳐다보면 웃음을 흘리는 게 느껴진다. 왜 그러지?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그런 시선이 싫지는 않다. 아무튼 주인아줌마는 여기에 자전거 종주하는 사람 자주 와서 자고 간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자전거를 어디 세워 놓았는지 물어 보는 것 같은데 실소가 나왔다.
서울에서 뛰어서 왔어요.
아줌마는 순간 아무 말도 못하고 한동안 놀랍다는 표정을 짓더니,
뛰어서 이틀 만에 여기까지 왔다고? 정말 대단하기도 하네. 5천원 더 빼줄게. 여기서 자. 주변에 여기 말고 잘 데도 없어. 계산 하고 따라 와.
라고 말하곤 내 손에서 카드를 빼았듯이 낚아 채어 결제를 한다. 젊은 아줌마는 내가 주인아줌마하고 한참을 대화하는 동안 말도 없이 아까부터 옆에 서서 내 눈도 못 마주치고 내외하고 있다. 달려서 국토일주하는 사람이 신기한 건지 아니면 나이에 비해 젊고 건강해 보이는 나한테 호감이 가서 그런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아니 어쩌면 나 혼자 김칫국마시고 있는 걸지도. 주인아줌마가 매점 매대에 진열되어 있는 칫솔 치약 등 세면도구를 척척 집어 들더니 앞장을 선다. 세탁 가능하냐는 물음에 손빨래만 해서 밖에 내다 놓으면 탈수해서 널어주겠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러닝모자며 러닝상의가 땀에 절어서 가만히 있다 보면 청국장 냄새가 코를 찌른다.
2층에 따라 올라가서 허름한 방문 하나를 열었는데 안에는 그럭저럭 잘만하다. 복도 끝에 아까 보았던 배가 부른 검정 개가 보인다. 아까부터 2층 복도는 자기 구역이라는 걸 알려주려는 듯 빙빙 돌고 있다. 아줌마가 열쇠로 문을 열고는 열쇠를 다시 가져간다. 안에서 똑딱이로 잠글 수가 있어 열쇠는 본인이 가져가신단다.
아줌마 가지신 거 말고 다른 열쇠는 없는 거죠?
그렇단다. 자기 말고 이 방문 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안심하고 자라고 한다.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는 방문을 닫았다. 검정개가 따라 내려가지 않고 아줌마 가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다.
19:39 오늘은 자기 전에 팔굽혀펴기를 해야겠다. 오늘 아침에 20개를 했으니 이번에는 한 개라도 더 많이 해야지. 힘들다. 팔 다리가 부들 부들 떨린다. 20개에서 가까스로 하나 더 하고 쓰러졌다. 그거 하는데도 땀이 비 오듯 한다. 얼른 씻어야겠는데 빨래거리가 눈에 보인다. 샤워를 하고 나서 빨래를 하자.
욕탕에 들어가 찬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이 닿는 순간 벌겋게 익은 다리에서 김이 난다. 수천 개의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 온다. 왜 이런가 가만 보니 키네시오 테이핑을 한 자리인 대퇴직근과 슬개근, 전경골근 쪽 피부만 허옇고 나머지 부위는 벌건 선분홍빛이다. 마치 엑스레이 사진을 보는 것 같다.
선크림을 바르지 않은 대가가 너무 혹독하다. 하지만 물집이 생길 것 같지는 않다. 눌러 보니 통증이 느껴지고 피부가 창백해 지는 것이 표재성 화상(1도 화상)인 것 같다. 심재성 2도 화상의 경우는 압력을 가해도 창백해 지지 않고 통증도 못 느낀다. 그렇다면 진피층은 손상이 없고 표피층만 화상이니 회복이 가능하다. 그나마 다행이다. 다리에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냉찜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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