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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목요일 세번째
오른 발목을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발목에서 시작한 통증이 온 몸으로 번져가고 있다. 한걸음 한걸음 디딜때마다 수 천개의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다. 해는 이제 중천에서 살짝 옆으로 비껴나가고 있지만 그 열기는 점점더 강해지고 있다. 한주가 옆에서 잘 따라 준다. 아마 혼자서는 또 바닥에 누워버렸으리라.
15:05 오후 3시가 되어서 기장읍에 도착했다. 오늘 하루 지금까지 약 3시간 동안 15킬로미터 이동한 셈이다. 발목과 땡볕과의 싸움이다. 부산의 햇볕에 온 몸이 통구이가 되는 느낌이다. 땡볕도 이런 땡볕이 없다.
15:15 이제는 정말 안되겠다. 발목통증을 참다 참다 도저히 못 참고 한주한테 한의원을 찾아달라고 했다. 사실 가만히 서서 지탱할 힘도 없는 상태다.
한의원은 도심이라 그런지 진찰받으러 온 환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순서를 좀 기다리자 금방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나서 진료실로 들어갔다.
내 배낭과 배에 붙은 부착물을 본 한의사 아저씨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강 상황을 알겠다는 듯이 바로 누우란다. 그리고는 발목에서 피를 뽑기 시작하는데 검붉은 피가 그야말로 한 사발이 나온다. 침을 발목뿐만이 아니라 별 상관없어 보이는 곳에도 꽂아 놓으신다.
물리치료까지 받고 나와서 계산을 하려 하는데 간호사가 의사선생님이 그냥 가시라고 했다면서 치료비를 안 받는다.
미치고 환장하겠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른다. 다음에는 부착물을 떼고 진료를 받든지 해야겠다.
혹시 나중에 인연이 될 듯하여 화성한의원 간판이 달린 배경으로 사진 한 방 찍고 다시 이동이다.
침을 맞아 그런 건지 또 걸어진다. 물론 속도는 전혀 못 내고 있다. 엉금엉금 기어간다.
17:01 기장읍내를 조금 벗어나니 해변 마을이 나왔다. 너비 수 백 미터 가량의 작은 포구(浦口)에 가지런하게 도열된 다시마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우리가 흔히 먹는 바다의 채소라 불리는 다시마. 똥 잘 누게 해주고 지방의 흡수를 방해해서 다이어트에 좋다는 다시마가 이렇게 만들어 지는 구나.
우와, 입이 딱 벌어진다. 정말 엄청나게 많다.
한주나 나나 다시마 말리는 광경은 처음 구경한다.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는 지금 이동항을 지나 칠암항으로 가는 길목이다.
17:36 어느덧 시간은 저녁 6시로 달려 가고 있다. 국토일주 1일차에 풀그림님, 아리아리님과 함께 20여킬로미터를 동반주한 이후 처음이다.
줄곧 앞장을 서서 간다. 핸드폰 지도앱을 보며 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앞장을 선다고 둘러대지만 실은 찡그려지는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이다. 발을 디딜 때마다 작은 쇠망치로 발뒤꿈치와 발목을 사정없이 때리는 듯 하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은 육체와는 달리 마음만은 행복한 이유는 역시 동반주의 힘이다.
하루 종일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이리 즐거울 줄이야. 게다가 한주가 어리다 보니 마치 삼촌이 조카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듯 그야말로 말문이 폭발했다.
말하느라 지도 보는 걸 놓쳐서 길을 빙빙 헤매는 나를 한주는 째려보고, 나는 미안해 하면서도 계속 이야기한다. 어리고 착한 아이와 동반주라 나름 반평생을 살았다고 내가 말이 많아진다.
듣기 싫든 말든 쏟아내 버렸다.
한주야,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 되어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잖니? 하지만 인생은 내가 주도할 수 있는 거야. 방법을 알려 줄게.
첫 번째, 현재의 삶을 미래에 가서 보는거야.
십 년 후의 내가 지금의 나한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은지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거지.
십 년 후 그러니까 서른 두 살이 된 한주는 지금 스물 두 살의 한주한테 어떤 말을 해줄 것 같니?
한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두 번째는 삶을 멀리서 보는 훈련을 하는 거야.
영국의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 알지? 찰리 채플린이 한 말 중에 ‘모든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인데 멀리서 보면 그렇게 희극일 수가 없다’ 라는 명언이 있어.
연인하고 헤어져서 인생이 무너지는 것 같은 순간도, 상사한테 혼나서 회사를 때려 치우고 싶은 그 비극적인 순간도 사실 한 발자국 물러나서 상황을 관조(觀照)해보면 그렇게 희극일 수가 없는 거야.
모든 순간은 지나가잖아. 우리는 인생이란 긴 선을 사는 것 같아 보여도 그 선은 수많은 점으로 이루어져 있어.
다시 말해 순간 순간이 모여 우리 삶이 만들어져 가는 거거든.
다윗의 반지 알지? 반지 안 쪽에 솔로몬의 유명한 말이 적혀 있는데 바로 ‘이 또한 지나가리다’ 란 문구야.
지금 아무리 영광스런 나날이라 한들 지나가기 마련이고, 아무리 오욕으로 점철된 치욕스런 시간일지라도 이 또한 지나간단다.
그래서 순간 순간 그 시간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고 즐기면서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잘 사는 방법이야.
사람들이 국토일주하는 걸 정말 부러워하지. 하지만 쉽게 실행하지는 못해. 왜냐하면 이 또한 마찬가지로 멀리서 볼 때는 좋아 보이지만 막상 본인이 실제 그 상황이면 비극일 수 있거든.
밤에 차가 쌩쌩 다니는 캄캄한 도로 갓길을 헤드랜턴 하나에 의지해 달려야 하고 새벽에 몸이 쑤시고 도저히 걷지도 못할 것 같은 몸을 이끌고 다음 날이면 또다시 수십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하니 몸이 아픈 건 둘째치고 정신력이 감당이 안돼.
하루이틀 사나흘은 모르지만 일주일 넘게 이런 생활을 한다는 건 완전 고행이거든.
그런데 이걸 계속 할 수 있는 동력이 뭔지 아니?
그건 바로 그 자체, 그 순간을 즐기는 거야. 이 모든 것이 지나가거든.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궁둥이 살이 쓸려 피가 나고 발목인대가 끊어질 것 같이 고통스러운 순간이라도, 이 모든 순간은 지나가기에 매 순간이 소중하고 행복해. 이른 새벽 지평선 너머 밝아오는 햇살에 눈물이 날 정도로 환희에 가득한 나날도.
인생도 마찬가지야.
신용불량이 되어서 채권업자의 빚 독촉을 받는 지옥 같은 순간도 사랑하는 이가 하늘나라로 가서 죽어버리고 싶은 순간도 부모가 미워서 자식이 미워서 형제가 미워서 한 평생 안 보고 싶을 정도로 미운 그 순간도 모두 다 그 전의 점 하나씩 모여서 지금이 된 것이고, 또 지금의 점 하나도 금방 지나간다는 거지.
그래서 누가 보더라도 아무리 힘들 것 같은 상황에서라도 내가 그 순간 내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매순간을 즐긴다면 그 사람은 이미 인생의 성공자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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