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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일 일요일 네번째
13:46 시간은 어느덧 오후 1시 반이 지나고 있다. 이제 월포해변까지 10킬로미터 남짓 남았다. 빠른 걸음으로 2시간 거리다. 그런데 이오이오님이 앉아서 발가락을 쪼물락거리고 있다.
뭐해요 형님.
어, 별거 아냐 왼쪽 발 엄지발가락에 물집이 잡혔어.
보아하니 제법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예닐곱 시간을 달리고 걷고 했으니 그 정도 물집 잡힌 것이 다행이다. 옷핀으로 물집을 터뜨리고 반창고를 붙인 후 다시 출발이다.
이오이오님이 준형이에게 묻는다.
아, 그런데 준형이는 어떻게 할래.
저는 월포에 할아버지가 살고 계세요. 오늘 월포에 도착해서 할아버지네로 가죠 뭐.
그래? 준형이가 월포까지 안내해주면 우리는 정말 땡큐지.
이번에는 준형이가 물어 본다.
칠포에서 월포까지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해안길을 따라 가는 길이고 두 번째는 중간까지 가로 지른 다음 해안가로 가는 길이 있어요. 어떻게 갈까요?
이오이오님과 잠시 눈 마주치고는 이구동성으로 지름길로 가는 것으로 의견일치.
준형이는 출발하면서 가로지르는 길은 언덕이 많이 있어서 자전거도 힘들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래 뭐 까짓그래 봤자 10킬로미터 거리인데 한번 달려 보지 뭐.
13:49 칠포해변에서 출발. 준형이가 앞장 서고 그 다음 나 그리고 이오이오님이 일렬로 서서 도로 갓길을 뛰어 간다.
이런 젠장, 오르막 내리막길을 자전거가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 놓치지 않으려고 그 뒤를 이오이오님과 내가 거품 물고 쫓아간다. 발목도 제 정상이 아니고 다리에도 힘이 풀려 앞꿈치를 사용하지 못하니 터벅터벅 뛰는 것이 발바닥 전체에 불이 날 지경이다.
조금이라도 뒤쳐질라치면 준형이가 한참 먼저 가서 기다렸다가는 빨리 오라고 재촉이다.
네가 뛰어 봐라.
졸지에 준형이는 감독이요, 우리는 선수가 되어 버렸다.
14:30 드디어 국토종주 고성 동해안 자전거길을 만났다. 이제부터는 월포해변까지 5킬로미터 남짓한 해안가 해파랑길을 따라 쭉 가기만 하면 된다. 셋이 기념사진 한 방 찍은 후 다시 출발이다.
역시 혼자 달리는 것보다 여럿이, 그리고 앞에서 누군가가 끌어 준다는 것은 엄청난 힘이 된다. 흔히 말하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준형이가 해주고 있다.
발목이 아픈 것도 잊고 계속 달린다. 이오이오님이 힘이 좀 부치는지 가끔 뒤에 쳐지긴 하지만 꾸준하게 달려 온다. 나는 그저 준형이 자전거 뒷바퀴만 보고 달린다.
15:01 30분 정도 달렸을까?
이제 저기에요.
준형이가 손가락을 들어 앞을 가리킨다.
아! 저 멀리 표지판 하나가 보인다. 오늘의 종착지인 월포해변이다.
시간은 오후 3시,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너덜해진 몸을 이끌고 6분 페이스로 달린 셈이다. 이 모두 오늘 우연히 얻은 인연, 준형이 덕분이다. 국토일주 시작한 이래 가장 일찍 마무리 한 날이다.
얼마 있자니 뒤쳐졌던 이오이오님이 뒤따라 해변가로 들어 온다. 이오이오님은 오늘 12일차 국토일주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함께 완주했다.
수고했어요. 형.
이오이오님과 둘이서 껴안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 누가 보건 말건.
이오이오님에게 물어 보았다.
형님, 오늘 이동거리가 37킬로미터라 동반주한 거리가 짧아 아쉽지는 않으셨어요?
아, 나는 이제까지 가장 길게 달려본 거리가 10킬로미터가 전부야.
놀란 눈을 하고 있는 내 앞에서 이오이오님은 오늘 국토일주 경로를 완주한 것에 대해 진정으로 행복해 하고 있었다. 아니 그건 비단 이오이오님만이 아니었다. 준형이와 나, 그리고 이오이오님 모두의 행복이었다.
준형이와 우리는 월포해변에서 마지막 사진을 찍고 반드시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아쉬움을 나누며 헤어졌다.
준형아, 시험 잘 치루고 다시 꼭 만나자.
15:12 근처에 가장 저렴하다 싶은 모텔을 찾고 있는데 마라톤 카페회원인 낮주님한테 연락이 왔다. 내일 점심 때 어디쯤 통과할거냐고 한다. 아마도 이 쪽에 업무를 핑계로 응원 차 올 계획인 것 같다.
내일 이동거리를 보아 하니 느지막이 아침 7시에 출발을 한다 해도 11시에는 남호해변을 통과할 것이다.
남호해변이라고 말하니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한다.
신경 써주는 것이 그저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담도 되었으나 서울에서 이렇게 멀리까지 찾아와서 응원해주는 노력과 성원이 사실 큰 힘이 되는 것은 절대 부정할 수 없다.
내일은 낮주님 만날 것을 기대하며 또 힘을 내본다.
18:27 하루의 피곤과 여장을 풀고 일찍 식사를 하러 나왔다.
문밖을 나서자 마자 물기를 가득 머금은 바다 바람이 날아와 뺨에 닿는다. 바람이 시원하다. 아직 개장이 안된 해질녘 붉은 바닷가는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자연 그 자체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고 가끔 갈매기만 날아 다닐 뿐이다.
해안가에 다다르자 보이는 모든 풍경들이 온통 붉게 번져가고 있었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
바다가 보이는 작은 횟집에 들어가 앉아 있으니, 이 세상이 다 우리 것이다.
이모, 여기 시원한 물회 두 사발하고 맥주 두 병 주이소.
이오이오님이 마치 수 십년은 알고 지낸 누이에게 말하듯이 식사 주문을 하고, 얼마 안 있어 가게 아줌마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상을 차린다.
열린 창문으로 비릿한 내음이 바다 바람에 실려 와 콧잔을 간지럽힌다. 바람에 방풍 자켓 속에 감춘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지만 후진 체력이 된 걸 내색하기 싫어 물회를 한 숟갈 떠 먹는 척 하면서 오늘 하루종일 함께 한 이오이오님을 훔쳐본다.
이오이오님은 내가 쳐다 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어여 먹어 하면서 반찬을 내 앞으로 놓아 준다.
내 이 순간의 감정으로는 뭐라도 내어 주고 싶은 사람이다.
몇 년을 알고 지내도 가까워지기 어려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 하루만에 내 모든 걸 주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알았다.
창문너머 들려오는 소리를 느껴 본다. 끼룩 끼룩 갈매기 울음소리와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 그리고 물회 한 사발과 시원한 맥주 한 잔의 목넘김은 그야말로 예술 그 자체 아닌가?
나는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리라.
12일차 경로: 포항시 남구 오천읍-포항고속터미널(10km)–흥해읍사무소(10km)–칠포해변(북구 흥해읍)(7km)–월포해변(청하면 월포리)(10km) 총 37km
"좋은 인연이란? 시작이 좋은 인연이 아닌 끝이 좋은 인연입니다. 시작은 나와 상관없이 시작되었어도 인연을 어떻게 마무리하는가는 나 자신에게 달렸기 때문입니다."
혜민스님
인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변해야 합니다. 시간을 다르게 쓰기, 장소를 바꾸기, 그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결심하기'는 2차적인 산물입니다.
여기서 세 번째인 새로운 만남에 대해 우리는 단 십분간만이라도 깊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남의 인연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 인연을 어떻게 가꾸어 나갈 것이냐가 더 중요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스쳐 지나가도록 놓아 두고, 가까이 맴도는 인연은 최선을 다해서 좋은 인연이 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어설픈 인연만을 만들어 삶에 이도 저도 아닌 인연들로 가득차게 해서는 안될 것이고, 잡아야 할 인연을 신경쓰지 않아 놓쳐 버리는 실수를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인연에 너무 연연해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또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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