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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5일 수요일 두번째
08:20 그냥 들고 걷는다. 날씨가 흐려 녹지도 않는다. 한참 걷다 보니 어느 정도 녹은 것 같아서 음료수는 마시고 생수는 지나가는 동네 할머님께 드렸다. 좋아하신다.
가다가 계속 멈추게 된다. 아침에 물과 음료수만 마셔서 그런지 달리다가 몇번이나 소변을 보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이동거리가 길다. 경로 하나씩 밀린 것이 오늘 이동거리 65킬로미터가 되었다. 목표는 강원도 입성. 그러려면 평지나 내리막길에서는 조금씩 뛰어 주어야 한다.
오늘로 국토일주는 15일차가 되었다. 실질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날짜는 4일이 남아 있는 셈이니 이제 부상을 각오하고서라도 뛰어야 국토일주 최종 목표지점 양양까지 도달할 수 있다.
아무튼 오늘 지금에 집중하자. 기성망양해변에 가면 타이어킹님을 만날 수 있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없던 힘까지 끄집어 내는 묘한 마력이 있다. 그래서 릴레이를 하면 거품물고 달리게 되는 이유이다.
08:38 몸이 다른 날보다 가볍다. 살살 뛰는데 발목 통증이 올라오지 않으니 기분이 묘하다. 그런데 왠지 아침부터 뭔가 시큼한 거름냄새가 주변에 계속 나는 것 같다. 걸어도 나고 뛰어도 나고 이게 어디서 나는 냄새인고?
두리번거리며 어디서 나는지 근원지를 찾아 봤더니 이런 아뿔싸, 빨래를 하루 안 했다고 옷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땀냄새다. 어제 팔굽혀 펴기를 하고 가슴이 뻐근해서 손빨래 안하고 그냥 잤던 것이 낭패였구나. 거 땀냄새 한번 되게 격하다.
그런 와중에도 배에서는 연신 꼬르륵 하는 소리가 계속 울린다. 어제 밤에 깜박하고 빵 등 간식을 사지 않은 채로 여관에 들어가 자는 바람에 오늘 아침에 일어나 먹은 것이 없다. 그나마 공사장에서 어떤 경상도 아저씨가 건네준 음료수 마신 것이 전부다.
기성망양해변까지는 아직 13 킬로미터 정도 남았다. 아무래도 이러다가는 허기가 져서 중간에 걸을 힘이 바닥날 수도 있겠다. 제길, 아침에 문을 열은 음식점에 들려서 아침식사를 해결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하면 무엇 하랴.
국토일주에서는 식당이 보이는 바로 그 곳에서 해결해야 한다. 식당 또 있겠지, 하지만 아니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없으면 완전 낭패이기 때문이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플까 봐 미리 먹어두어야 하는 것이 국토일주의 생존전략이다.
국토일주는 먹고 자고 싸고 씻고에 대한 배고픔 졸림 배설 청결 욕구 등 1차원적 본능의 문제, 그리고 나아가 인간 본연의 본성에 대한 문제가 항상 존재하고 또 이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두려움, 외로움, 긍정과 부정, 이성과 감성, 순발력과 인내력, 끈기와 오기 등에 대한 감정요소이다. 물론 이외에도 국토일주는 다양한 정신부분에 대해 테스트를 한다. 하지만 테스트는 극복하고 통과하는 데에 그 재미가 있다.
인생 역시 마찬가지이다. 매사 인내가 필요한 순간이 있고 결정을 내리고 행동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지금은 인내해야 하는 시점이다. 토가 올라올만큼 격한 땀냄새와 먹은 것 없이 달려야 하는 배고픔의 문제를 인내하고 해결해야 한다.
기성망양까지 직선코스가 있지만 그러면 경험상 중간에 먹을 수 있는 곳은 없다. 그러면 바로 우측으로 꺾어서 해변가까지 가서 해안가를 따라 위로 올라가면 뭔가 매점이라도 있을 것이다. 지치기 전에 좀 달려 보자.
09:46 10여 킬로미터를 이동해서 기성면에 도착했다. GPS를 체크해보니 6분 페이스, 꽤 빠른 페이스로 달려 왔다. 컨디션이 요 며칠 이래 최상이다.
트랙터를 타고 가는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요 근처에 음식점이나 매점 등이 있는지 물어 보니 이 곳에는 먹을 곳이 없다면 혹시 모르니 해안가로 한번 가보라고 한다.
감사합니다! 크게 외치고는 다시 해변으로 뛰어 갔다.
마을이 하나 나오고 동쪽 방향으로 골목 골목을 빠져 나가보니 바다가 보인다.
아, 바다다.
해안선을 따라 쭉 이어져 있는 집을 두리번거리며 훑어 보는데 매점이라고 쓰여진 가게가 하나 보이고 다가 가보니 문이 닫혀 있다.
아, 정말 배고프다.
10:07 길가를 쭉 따라가다 보니 한쪽에 할머니들이 대여섯 명 모여서 입안에 뭔가를 오물오물 씹으시며 담소를 나누고 계신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모여서 밭일 등을 하시고 잠깐 쉬시는 것 같다.
할머니, 혹시 이 근처에 매점이나 음식점 등 뭐 좀 먹을 데가 있나요?
없어 없어 여긴 하나도 없어 저기 저 평해까지 가야 해.
할머니 제가 평해에서 여기까지 왔거든요. 저쪽 기성망양 방면으로 가는 길에는 없나요?
기성망양까지 가야 해.
아, 절망이다.
먹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고파온다. 얼굴에 좌절의 기색이 역력하게 보였는지 한 할머니께서 뭔가를 한 움큼 쥐어서 얼굴 앞에 내민다. 뭔고 하고 봤더니 할머니들 입에 계속 오물거리던 정체 모를 열매다.
이게 뭔가요?
어, 그냥 먹어. 그거 먹으면 배 불러.
얼떨결에 두 손 가득 받아 든 나는 이제 할머니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졌는지 투명인간이 되어 다시 할머니들끼리 흥겨운 담소의 배경이 되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자리를 떠나 절망하며 걸어가면서 빠알간 작은 과일을 입 속에 하나씩 넣고 먹어 보는데 이거 가만 보니 앵두 같다. 그래 ‘앵두 같은 입술’이라고 할 때 그 앵두.
그런데 어라 이거 맛도 괜찮고 허기가 조금씩 가신다. 거참 신기한 일이다.
그래 이제 다시 가자. 기성망양에서 타이어킹님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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