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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8일 토요일, 여섯 번째

 

 

22:12 몽롱한 상태에서 달려가다 보니 종주 자전거길을 놓쳤다. 표식을 따라 제대로 따라갔다고 생각했는데 국도와 교차하는 지점에서 표시가 산으로 간다. 어라,자전거길이 해안가 쪽으로 안 가고 산 위로 이어지다니. 어쨌든 가보자. 끊어질 듯한 발목을 끌고 표식을 찾아 몇 백 미터를 올라갔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가 없다. 그저 사방이 캄캄한 산길이다.

어떻게 할까, 계속 산을 타고 올라가서 자전거 길을 찾아 볼까, 아니면 다시 돌아가서 국도를 타고 갈까?

이 상황에서 산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는 건 미아 되기 십상이고 야간에 국도를 타는 건 내가 꺼려하는 최후의 방법이다. 어떤 선택을 하던지 체력이 극한으로 떨어진 지금 이 시점에서는 뭐든 최악의 선택이다. 국토일주하면서 이런 상황은 날 것으로 표현하자면 한마디로 X같다.

다시 한번 앞 뒤를 몇 번씩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표식을 찾아 봤지만 없다. 거참, 이상하다. 내가 뭘 놓쳤을까? 헤드랜턴으로 산 위를 비춰보니 그리 높은 것 같지는 않다. 얕은 언덕배기 수준이라면 빠르게 뛰어서 넘어도 되지 않을까, 표식이 중간에 끊긴 것일 뿐 내가 길을 놓친 것은 아니지 않을까?

 

22:15 조끼배낭 가슴 끈을 단단히 연결하고 몇 백 미터 언덕을 차고 올라가 본다. 얕은 언덕이라 보고 속도를 냈는데 숨이 차다. 헤드랜턴이 비추는 동그란 원 안의 세상만 보고 올라가는데 이상하리만큼 주위가 적막하다. 귀뚜라미 소리 하나 안 들린다. 너무 고요하다. 뭔가 잘못 되어 가고 있다.

순간 개 떼의 울부짖음. 정말 예상치 못했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에 산 속에서 울부짖는 개 떼를 마주쳤다. 그 소리는 급기야 점점 커져서 수백 마리가 합창하는 것이 마치 천둥소리 같다. 순간 넋을 잃고 헤드랜턴으로 길가 양 옆을 비춰보니 랜턴에 비친 개의 눈빛만 수십 개는 되어 보인다.

젠장,여기는 어디냐, 산 중턱에 개들이 사는 마을이 있는 거냐,개 사육장이 있는 거냐. 개들 짖는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거의 반사적으로 다시 거꾸로 내리 달리기 시작했다. 빨리 개 짖는 소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다. 헤드랜턴이 밝히는 동그라미 원 속의 길을 따라 거의 전속력으로 달려 내려간다. 내 생전에 이보다 더 빨리 달린 적이 있었을까? 개 짖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 그런데 바로 앞에 바위 큰 게 하나 보인다. 뛰어 넘어가야지 란 생각과 딛고 점프해야지 란 생각이 겹쳤다. 문제가 생긴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공중에서 바위에 발이 걸리며 그대로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지며 몇 바퀴를 굴렀다. 해머로 머리를 내려치는 듯한 아픔이 밀려 온다. 머리에서 따뜻한 액체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주위가 새카맣게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눈 앞이 뿌옇다. 눈이 감긴다.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안돼.

 

 

 

200511610:57 30킬로미터 지점이다. 러닝팬츠 뒷주머니에 꼼쳐 둔 총알을 하나 꺼내 든다. 제발 내게 힘을 다오. 손이 얼어 겨우 이빨로 짤라 쭉 빨아먹고. 급수대를 지나가며 이온음료 하나 잡아 마시고. 이대로만 가면 서브 쓰리다. 페이스는? 오케이, 킬로미터당 415.

길은 빙판이다. 물 마실 때 조심해야지. 얼음이 아스팔트에 얇게 깔렸다. 미끄러질뻔했네.

이제 12킬로미터하고도 195미터 남았다. 이제 굴러도 간다. 이를 악물고 스피드를 내본다. 하지만 속도가 나지 않는다. 불안하다.

 

35킬로미터 지점을 통과한다. 이제 스퍼트를 하느냐 마느냐 결정을 내려야 한다. 지금 속도를 내면 완주 자체를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안되겠다.

달리다 보니 저 멀리 탄천교가 보인다. 이제 남은 거리는 5킬로미터. 37킬로미터 지점이다. 마지막 투혼을 불살라야 한다. 작년 초 폐병환자가 지금은 42.195킬로미터를 달리고 있다. 그 것도 3시간 이내를 목표로 말이다.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출발해서 성남을 돌아 다시 잠실종합운동장으로 돌아오는 순환코스, 중앙일보 서울마라톤대회다.

 

37킬로미터 지점 통과기록이 대략 2시간 40분이다. 젠장, 이제 앞으로 4분 페이스로 뛰어야만 서브 쓰리를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다리가 말을 안 듣는다. 맞바람도 장난 아니다. 페이스가 조금씩 밀린다. 속도가 나지 않는다. 눈물이 왈칵 나왔다. 이대로 끝나는구나. 지금 스퍼트를 하기엔 너무 힘이 달린다. 지금 무리하게 스퍼트 하다가는 몇 킬로미터 안 남겨 놓고 퍼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마지막인 것처럼 달려 보는 거야. 이를 악물고 뛰어 본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 진다. 엉엉 울고 싶다. 잠실로 꺾어지는 곳이 저 멀리 보인다. 도로에서 응원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카페 단복을 보고 응원을 한다.

마라톤114 파이팅! 힘내세요! 다 왔어요.

 

이제 40킬로미터 지점에 들어 섰다. 갑자기 왼쪽 종아리에 쥐가 나려 하는 걸 주먹을 불끈 쥐고 참아 낸다.

41킬로미터 지점. 주 경기장이 정면으로 보인다. 이제 숨이 턱까지 찼다. 풀무질을 하는 듯 거친 숨소리가 거리의 응원소리와 함께 귓가에 꽉 차 들어 온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운동장입구에 들어서 이제 트랙 마지막 한 바퀴다. 추월에 추월을 거듭하며, 마치 100미터 달리기 하듯 결승점 골인.

기록은? 3시간 18. 아쉽다. 35킬로미터 지점부터 속도가 급격하게 떨어진 것이 문제였다.

옷을 갈아 입기 위해 물품보관소까지 가는데 힘이 풀려 못 걷겠다. 아니, 그보다도 감정이 북받쳐 올라 못 참을 수가 없다. 겨우 몸을 가누며 사람 눈을 피해 주차장으로 가서 차들 사이로 들어가는 순간 참고 있던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다. 왜 우냐고? 이유가 뚜렷이 있을까?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아내도 생각나고 아이들도 생각났다. 몇 분간 그렇게 울고 났더니 상쾌해졌다. 이게 인생인가 보다. 이게 마라톤인가 보다. 고개를 들어 보니 저 멀리 동호회 천막에서 카페 회원님들이 두 손을 흔들며 환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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