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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8일 토요일, 일곱 번째

 

 

22:21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머리가 지끈거린다. 눈을 떠 고개를 들어 보니 온 몸이 축축한 채로 수풀 속에 누워있다. 먼지 같은 수증기가 내려 앉고 있다. 안개 속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내가 왜 누워있지? , 그래 이런 바보, 지금 나는 국토일주 중이었잖아. 내가 바위를 타고 넘다가 걸려 나뒹굴었던 것이 틀림없다. 머리부터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었던 것이리라. 눈이 잘 안 떠진다. 머리 옆 부분에 통증이 너무 심해 손을 대보니 진득한 액체가 만져진다. 혹시 피인가? 저기 저 편에 밝은 빛이 있는 것이 헤드랜턴인 듯싶다. 벗겨지면서 수풀 아래로 튕겨나갔나 보다. 아니 어떻게 넘어졌길래 헤드랜턴이 저기까지 갔을까? 기어가려 하는데 오른쪽 손목이 욱신거린다. 넘어질 때 오른 손으로 땅을 짚었나 보다. 다른 데는 이상이 없는 듯 하다. 다행히도 헤드랜턴과 모자가 한 곳에 있었다. 머리 만진 손을 랜턴 불빛으로 비춰보니 피가 묻어 있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바위 어디에다 찍은 듯하다. 그래도 터져서 피가 나왔으니 다행이다. 만일 터지지 않았으면 어쩌면 뇌출혈로 골로 갔을 수도 있었다. 물티슈를 꺼내 얼굴과 손과 터진 머리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피가 그리 많이 나진 않았다. 대신 머리는 비정상적인 짱구머리가 되었다. 이런 짱구는 난생 처음이다.혹이 거짓말 하나도 보태지 않고 아이 주먹만 하다.

 

이동해야 해. 이대로 머물러서는 안 돼. 일어나려는데 오른 발목에 극심한 통증이 밀려오면서 그대로 다시 무너져 내렸다. 도저히 오른 발목에 힘을 줄 수가 없다. 넘어질 때 발목이 꺾였었나 추측해보지만 정확한 원인은 알 길이 없다. 큰 일이다. 갑자기 공황상태가 되었다. 이 캄캄한 산 길 어둠 속에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인다니. 최악의 상황이다. 핸드폰으로 구조요청을 해야 하나. 별의별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리 속에 떠오른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다음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왼손으로 오른발을 잡고 천천히 돌려 본다. 전기를 쏘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지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다. 이건 뼈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다. 발목인대나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것도 아니다. 골절되었거나 인대 또는 건이 끊어졌다면 발목에 손도 못 댄다. 이 정도 상태면……

강행군이다. 깽깽이로라도 간다. 일어나 보자. 그래 넌 할 수 있어. 한 발로 깽깽이하듯 이동해서 헤드랜턴을 다시 착용하고 산 길을 내려간다. 오른 발목에 힘을 못 주니 뭔가 짚고 갈 것이 필요하다. 마침 길에 긴 작대기가 눈에 띈다. 오호라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지팡이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한테는 작대기가 보이는 건가.

 

22:34 지팡이와 왼쪽 발에 의지해서 한 참을 내려가니 국도와 만나는 교차지점까지 왔다. 야간에 국도라 정말 싫지만 어쩔 수 없다. 국도를 따라 걸어가자. 차가 오는 길을 마주하고 도로 왼쪽 갓길로 이동한다. 간혹 지나가는 차 속도가 장난 아니다. 차들이 안개 속 도로를 질주한다. 불안한 마음에 나도 걷는 속도를 높여 본다. 발목 통증이 좀 사그라드는 것이 안개에 취한 건지 이제 괜찮은 건지 작대기를 짚고 가다가 들고 가다가 걸리적거리는 것 같아 아예 버리고 절뚝절뚝거리며 속보로 걷는다. 빨리 통과하고픈 마음이다.

몇 킬로미터를 이동했을까? 저 만치 휴게소 이정표가 보인다. 살았다. 저기 가서 급수를 좀 하고 쉬어야겠다.

 



22:50 38선 휴게소에 도착. 해파랑길로 가는 길을 알아 봐야 한다.

해파랑길을 놓쳐 국도를 탔는데 어디로 가면 다시 해파랑길로 갈 수 있을까요?

매점에서 급수를 하면서 판매직원에게 물어 보니, 손가락으로 문 넘어 저편을 가리킨다.

여기 나가서 오른쪽 길로 가면 바로 해파랑길이에요. 여기 휴게소가 11시에 마감인데 문닫기 바로 직전에 오셨네.

점원은 내가 다리를 절뚝거리는 걸 봤는지 걱정스런 눈빛으로 한 마디 덧붙인다.

다리가 그렇게 아파서 어떻게 자전거를 타요?

아직은 버틸만해요.

스치듯 말 한마디 던지고 나와 버렸다. 자전거는 우라질.

화장실 들렸다가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했다. 왼쪽 다리에만 의존해서 걷다 보니 이젠 왼쪽 종아리가 너무 아프다. 근육이 뭉치는 것 같다. 풀어줘야 하나 하지만 그러기엔 상황도 시간도 여유도 없다. 그냥 참고 간다. 양양터미날까지는 아직 15킬로미터 정도남았다. 젠장 정말X같다. 다시 가자. 걷고 걷고 또 걷는다. 오른쪽 발목은 전혀 힘을 줄 수가 없다. 그저 순간의 버팀대 역할이다. 오로지 왼쪽 다리를 이용해 이동한다.

 


 

23:22 하조대해변에 도착했다. 해안마을을 관통해서 지나가는데 가게이름이 114. 네이버 마라톤114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정말 뭐 눈엔 뭐밖에 안 보인다더니.

그나저나 이제 경로를 결정해야 한다. 해안가길을 따라 오산까지 갔다가 왼쪽으로 꺾어서 양양터미날로 갈지 아니면 해안가 길을 이탈해서 국도따라 바로 양양터미날로 가로질러 갈지. 거리가 약 5키 정도 차이가 나는 것 같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가로지르기로 했다. 이판사판 삼세판의 마지막 판이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다. 못 먹어도 고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디딜 때마다 바늘뭉치로 발목을 사정없이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오는데 단 몇 미터라도 단축해서 가고 싶은 심정이 절절하다.

이제 해안가 길을 빠져나와 도로로 이동한다. 이건 뭐 걷는 것도 아니고 기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 중간 즈음의 속도와 자세로 간다. 이제 조금 있으면 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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