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6월 5일 일요일, 세 번째
15:30 얼굴과 다리에 썬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나갔다. 밖은 예상대로 찜통이다. 옷도 말릴 겸 시간도 급하지 않으니 여유 있게 익산 시내를 구경한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엄마 손을 붙잡고 다니는 어린아이들이 많이 보인다. 초등학교생 정도 되보임직하다. 우리 애들은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국토일주를 하는 아빠를 보며 과연 무엇을 느낄까.
우리 아이들은 주변의 인식과 관념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걸 찾아 마음껏 살았으면 좋겠다. 춤추고 노래 부르고 목젖이 보이게 웃으며 인생을 즐겼으면 좋겠다.
15:41 사람들이 다들 양산을 쓰고 다니는데 그만큼 익산의 태양이 강렬하다. 그늘을 찾아 다니며 이동한다. 그늘이 없는 곳은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통과하고 그늘에서는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구경한다. 도시라고 하기에는 정말 한적하다. 일요일 오후 문을 닫은 가게도 많이 보인다. 장사가 안되나 란 생각보다는 삶이 여유롭다 란 생각이 든다.
16:32 해가 많이 내려와 있다. 오늘 김제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신태인읍까지 가서 하룻밤을 묵을 계획이다. 김제까지 20여 킬로미터, 신태인읍까지는 16킬로미터다. 평상시라면, 아니 부상만 아니라면 36킬로미터쯤이야 즐기며 갈 수 있는 거리이지만 지금은 한숨만 나오는 거리다.
16:46 태양을 피해 걷다 뛰다 가다 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배낭과 배에 부착되어 있는 국토일주 문구를 보고 파이팅을 외친다. 땡볕에 배낭을 메고 걷는 것도 아닌 뛰고 있으니 그저 신기할 것이리라.
도로 옆 인도를 뛰는데 이건 인도라기 보다는 정돈되지 않은 잔디밭 같다. 그러고 보니 익산시에는 풀로 덮여 있는 인도가 많다. 몇 십 년은 돌보지 않은 인도가 나한테는 그저 이국적이기만 하다. 난 왠지 이런 길에 끌린다.
익산시가 작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도심 빠져나가는 것도 만만치 않다.
햇빛을 피해 한참을 달려 왔건만 아직 익산 공용터미날이다.
17:05 시계는 벌써 오후 5시가 넘어가고 있다. 백 년은 되었을 만한 고풍스런 다리를 하나 건너나 싶더니 김제평야가 눈 앞에 좌악 펼쳐진다.
어디를 둘러 보아도 논이고 밭이다. 가도 가도 논밭이다.
어느 정도나 갔을까? 국도를 만났는데 지도를 살펴 보니 건너서 다시 논밭길로 가야 한다. 그런데 국도 옆에 자그마한 매점이 하나 있다. 아직 목마르거나 배고프진 않지만 들리기로 했다.
국토일주를 하면서 세운 원칙 중에 하나는 마트가 보이면 배고프건 아니건 무조건 들려서 배를 채우고 간다는 것이었다. 빵과 우유를 사서 우걱우걱 배에 채워 넣었다. 먹으면서 생각해 보니 내 원칙 중에 하나가 내가 만든 원칙에 내가 얽매이지 않겠다는 것도 있다. 그러고 보면 무원칙이 원칙인 셈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아 이런, 시계에 시선이 멈췄다. 젠장, GPS가 안 켜져 있다. 어디서부터 안 켜고 온 걸까? GPS 켜는 원칙만큼은 꼭 잊지 말아야겠다.
18:46 주위에 붉은 빛이 거뭇거뭇하게 덮이고 있다. 벌겋게 달궈진 해가 어느새 저물어 간다. 그래 오늘도 세상을 덥히느라 너 참 고생했다. 이제 그만 쉬어야지.
김제평야 지평선 위로 벌겋게 물들어 가는 하늘과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르스런 논밭이 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가끔 그 하늘과 땅을 연결한 듯한 희멀건 회오리 구름 또한 참으로 장관이다.
이제 발목 통증도 친구처럼 느껴진다. 통증이 안 느껴지면 뭔가 어색하고, 통증이 느껴지면 오, 친구여! 너 또 왔는가! 반가운 마음이 들 정도이다.
19:55 김제시에 거의 다 달은 듯 하다. 아직 해가 똑 떨어지진 않았다. 해질녘 김제시의 저녁이 이국적이다. 마치 느리게 돌아가는 무성 영화 필름을 보는 듯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의 움직임이 느릿느릿하다. 상대적으로 내가 달리고 있어서 그런 것인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적용되는 순간이다. 아 이런 순간을 또 언제나 만나 볼 수 있을까?
달리며 보이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인생 파노라마가 시공간을 초월해서 온 몸으로 느껴진다.
사람이 생로병사(生老病死)하여 희로애락(喜怒哀樂)이다. 거기서 거기다. 나만 특별한 것이 없구나.
태어나 늙어가고 아프고 죽을 때까지 다들 똑같이 기쁨도 느끼고 노여움도 느끼고 슬픔도 느끼고 즐거움도 느끼다가 인생을 마감하는 건 똑 같은 것임을.
그저 순간에 집중해서 최선을 다하고 순간 순간을 즐기며 그렇게 살면 그것이 낙원이고 천국이리라.
김제 도심을 통과하며 이 순간을 좀 더 느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김제시에서 오늘 마무리를 할까? 발목에 통증이 있긴 하지만 어제처럼 극한의 고통은 아직 안 왔고, 온다 하더라도 달고 갈 수는 있다. 그래 그럼 어떻게 할까? 멈출까 아니면 신태인읍까지 16킬로미터를 더 갈까?
20:05 결정 내리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 오늘 김제시에서 잔다.
이 순간을 즐기자. 내가 내 안의 나에게 다시 말한다. 계획을 수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 실망시키는 것이 두려운가?
네 인생은 네 것이야. 하고 싶은 대로, 즐기는 대로 하라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지금 당장 시작하라고. 과거도 미래도 몽땅 가져와서 지금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이 자체를 기뻐하고 이 순간을 즐겨야지.
바람이 분다. 유월의 바람치고는 꽤 선선한 바람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어두워지기 바로 직전 주황색 물감을 뿌려놓은 듯한 해질녘 김제시 하늘이다.
5일차 경로: 전북 익산시청–김제시청 총 20km
"계획한 대로 되는 일은 없다. 하지만 계획을 세우지 않고 되는 일은 없다."
"Plans are worthless, but planning is everything"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미국 34대 대통령)
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자 미국 34대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가 한 말이다. 무슨 말인가 보면 결국 인생에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세운다 하더라도 그렇게 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계획 없이 살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에게 계획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계획대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 않는데 뭐 하러 계획을 세워?'라고 생각했다면 이제 그런 바보 같은 짓은 그만 하자.
계획을 세우는 행위 그 자체, 그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이다.
'국토를달리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51. [6일차② 전북신태인읍] 읍내에 들어오니 음식점에 죄다 암뽕국밥이 (0) | 2017.04.10 |
---|---|
50. [6일차① 전북김제] 이제 전라남도를 향하여 (0) | 2017.04.10 |
48. [5일차② 전북익산] 국토를 즐기며 달린다는 의미로 국토일주(國土逸走) (0) | 2017.04.10 |
47. [5일차① 전북익산] 구간을 재조정하다 (4) | 2017.04.09 |
46. [4일차⑨ 전북익산] 그래 그 때 나는 한번 죽은 거다 (4) | 2017.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