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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 월요일, 네 번째
19:00 이제 모든 것이 초월상태이다.
궁둥이 사이 살이 쓰라린 것도 찢어지는 듯한 발목인대와 아킬레스건의 통증도 바늘로 찌르는 듯한 발바닥 아픔도 발가락의 물집도 죄다 국토일주 동안 나와 함께 할 녀석들이다. 이 놈들은 무지 질겨서 나를 떠나려 하지도 않는다. 걷고 달리는 내내 극심한 통증 이 놈들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지지만 그래도 화가 나거나 분노가 치밀어 오르진 않는다. 단지발목이 피로골절 상태로 가서 이 여행을 포기하게끔만 안되길 바랄 뿐이다.
국도가 고창까지 직선으로 나 있으니 이 길만 따라가면 된다. 어느덧 주변이 벌게 진다. 땅 거미가 도로에 짙게 드리워 지기 시작하면 그 아름다운 풍경과는 별개로 나는 마음이 조급해져 온다. 이제 어스름이 지나면 세상에 검정 보자기를 씌운 듯 갑자기 새까만 암흑이 거리를 지배하리란 걸 알기 때문이다.
속도를 내어 달려본다. 앞이 보일 때 조금이라도 더 이동해야 한다.
어서 오십시오 여기는 고창입니다
19:35 얼마나 갔을까? 큼지막하게 나타난 이정표에 고창이라는 문구가 대문짝 하게 박혀 있다.
그래, 고창에 들어 왔구나.
지도를 살펴 보니 고창 시내까지는 아직 십 여 킬로미터가 남아 있다. 발목이 통곡하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참아라.
19:55 도로가 산을 파고 만들었는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양쪽에 두고 큰 고개 하나를 타고 넘는다. 오르막이 끝나갈 때쯤 시계를 보니 저녁 8시가 가까워져 온다. 십 여 분 지나자 매번 그랬듯이 온 세상이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였다. 산 속이라 어둠이 더 빨리 찾아 왔다.
멈춰 서서 배낭을 풀러 야광조끼를 착용하고 야광밴드와 헤드랜턴을 켜고 배낭을 멘 후 다시 달린다. 이제는 익숙한 동작이다. 헤드랜턴이 밝히는 바로 앞 반경 2미터 가량의 동그란 불빛만 보며 발목의 통증이 심해지는 것을 느끼며 묵묵히 달린다.
가끔 옆으로 차들이 쌩 하니 지나가는 것도 이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멈춰서지도 피하지도 않고 그냥 내 갈 길을 간다. 각자 넘지 말아야 할 선만 지키면 사고는 일어 나지 않을 것이다. 가도 가도 똑 같은 도로다. 어쩌면 바로 발 밑 도로만 보며 달리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달렸는데도 제자리다. 아니 제자리 같다. 킬로미터 수가 줄지를 않는다. 체력보다도 정신력의 한계다. 육체적 고통도 심해지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21:00 버겁다. 한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어렵지만 그나마 버겁다는 것이 내 상태를 좀 더 가깝게 표현해주는 단어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힘듦이다. 정신력과 체력의 한계선을 넘나 드는 이러한 상태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가민 GPS 거리를 보니 고창시내까지는 이제 3킬로미터 정도 밖에 안 남았는데 나의 모든 것이 바닥났다. 체력도 정신력도 인내심도 의지력도 사고력도 냉정함도 모든 것이 바닥이다.
4차선 도로 갓길을 따라 야트막한 고개를 또 하나 넘으니 저 멀리 지평선에 불빛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거리상 고창 시내가 틀림없다.
저기만 가면 되는데, 저기만 가면 누울 수 있는데, 씻을 수도 있고 밥도 먹을 수 있고 잠도 잘 수 있는데 이제 더 이상 다리가 안 떨어진다. 서 있는데 몸이 휘청거리고 눈이 감긴다. 이러다 길가에 쓰러져 잠이 들고 그러다 죽으면 낮에 차를 몰고 지나가는 운전사 어느 누군가 나를 발견하겠지? 그리고는 뉴스에 나오겠지?
불우아동후원모금을 하기 위해 국토일주하던 윤 아무개씨 고창근처에서 달리다 지쳐 사망하다 라는 타이틀로 온갖 SNS에 도배가 되겠지? 미친다. 뭣보다도 쪽 팔려 그럴 수는 없다. 가우가 있지. 내가 그렇게 죽을 수는 없다.
온 몸이 아프고 목 마르고 배고프고 서 있을 기운도 없지만 나는 간다. 나는 계속 이동한다.
21:08 발 밑 헤드랜턴이 비추는 도로 갓길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렇게 몇 천 보를 걸었을 것이다. 한계에 도달했다.
어느 순간 그나마 지푸라기 잡듯 놓치지 않던 집중력이 일순 사라지면서 내 스스로 내 의식을 놓아버렸다. 다리가 완전히 풀렸다. 몸이 잠깐 휘청거리는 걸 느낀다. 바닥이 내 얼굴로 다가 온다. 말도 못할 통증이 느껴진다. 의식이 사라지는 게 느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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