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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 월요일, 세 번째
13:43 순간 잠이 들었나 보다. 발가벗고 한 시간을 넘게 자버리다니. 몸이 식어서 으슬 으슬 춥다. 다시 온탕으로 들어가서 몸을 덥힌다.
12년 전 무모하기만 했던 마라톤대회 풀코스 도전은 내게 삶에 대한 도전이자 반항이었고, 나를 테스트하기 위한 일종의 시험이었다. 하지만 그 때는 왠지 완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죽음의 문턱 그 앞까지 갔다 와서 그런 것일까? 죽으려는 용기로 뭐든 못 할 건 없다는 생각이었을까?
아무튼 건강을 되찾기 위해 아니 인생의 밑바닥에서 탈출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신청한 마라톤대회가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릴 줄 그 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15:07 시계바늘이 정동향을 가리키고 나서야 사우나에서 발걸음이 떨어졌다. 아직 햇빛은 강하지만 녀석의 힘은 조만간 빠질 것이다.
도시를 벗어나기 전에 뭘 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배가 그리 고프진 않지만 그 간의 경험상 이러다가 중간에 배고프면 그 때는 대책이 없다. 도심과 도심 사이는 그저 길 뿐이다. 매점도 음식점도 아무것도 없다. 지금 먹어 두어야 한다.
16:12 사람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아 들어가서 한 그릇을 비우고 계산을 하려는데 어, 카드가 없다. 이런! 틀림없이 사우나탕에서 계산을 하고 주머니에 넣은 것 같은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허둥지둥 거리자 식당아줌마가 괜찮다고 천천히 찾아보라며 주방으로 들어간다.
거참 이상하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기억의 필름을 거꾸로 돌려보니 아, 혹시 사우나탕에서 뭐라도 사먹을 요량으로 찜질방 반바지에 카드를 넣어놓았다가 다시 씻을 때 벗어서 빨래 통 속에 집어 넣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급한 데로 비상 카드를 꺼내서 계산을 하고 다시 그 사우나탕으로 뛰어 갔다. 빨래 통이 안 바뀌었으면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도착하고 나서 혹시 싶어 사우나 카운터에 물어보니 분실된 카드가 없다고 하고, 사우나탕에 들어가서 빨래 통을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그래 없어져 버렸다.
이런! 제길, 어쩔 수 없다. 아내한테 전화해서 카드 분실신고를 하라고 하곤 이제부터는 내 비상 체크카드를 써야 하니 나머지 일주할 자금을 부쳐달라고 했다.
카드 쓸 때마다 문자가 아내한테 가기 때문에 그걸로 내 위치를 알고 안심을 했었는데 이제 그러지를 못하니 주기적으로 위치를 문자로 알려주기로 했다.
아, 사우나탕에서 식당까지 오며 가며 왕복 4~5킬로미터는 되었을 텐데 GPS 켜는 걸 또 잊었다.
18:02 카드 분실사건으로 인해 시간이 훅 지나갔다. 금방 밤이 찾아 올 것이다. 북이초교까지 22킬로미터, 그리고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장성읍까지 18킬로미터 총 40킬로미터가 남아 있다. 지금 이 체력에 갈 수 있을까? 만일 가다가 북이초교에서 기력이 앵꼬 나서 멈추게 된다면? 잠 잘 곳이 있을까?
문득 국토일주 3일차가 생각났다. 유구읍에서 청양군 청남초중학교까지 30킬로미터를 밤 중에 뛰어 가다가 잠 잘 곳을 못 찾아서 시체처럼 늘어졌던 그 쓰라린 기억.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
경로를 수정하기로 했다. 지도를 펼쳐 돌아가더라도 가장 가까운 도시를 찾아 가야 한다. 고창이 남서방향으로 22킬로미터 거리에 있다. 그래 고창이 있었구나.
그러면 오늘 전라남도 입성은 못하는군. 그래도 이 상태에서 고창까지 22킬로미터를 이동하는 것도 도전이다. 고창에서 하룻밤을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장성읍으로 가서 전라남도 입성을 하리라.
고창으로 경로를 수정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둠이 오기 전에 도착하는 것이 관건이다. 고창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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