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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8일 수요일, 아홉 번째
18:20 몇 분이나 지났을까. 어떤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 와서 정신이 들었다. 깜짝 놀라 눈을 뜨고 바라 보니 새마을모자를 쓴 농부아저씨다. 왜 그렇게 누워있냐고 물어 본다.
제가 국토일주를 하는데 지금 힘도 들고 배가 아픈데 화장실도 없고 지금 상황이 이렇습니다, 말을 하니 자기를 따라 오란다.
십 여 미터 가보니 무슨 사슴 농장 같은게 있는데 그 뒤 작은 집을 가리키면서 들어가면 화장실이 있으니까 볼 일을 보라고 한다.
감사합니다. 납죽 절하고 들어갔더니 이런! 화장실에 선풍기도 있고 변기에는 비데도 설치되어 있다. 할렐루야.
정말 충분히 볼 일을 본 다음 나오니 아저씨가 음료수도 하나 건네준다. 힘이 난다.
복 받으시라는 이 말을, 나오면서 두 번은 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다.
이제 힘내서 다시 가자. 속도를 높여 본다. 어찌 되었든 오늘로 서부종주는 끝장을 낸다. 마지막까지 투혼을 불살라 보자. 시계 GPS와 핸드폰 지도앱으로 방향을 잡고 이동할 수 있는 길이라면 어디든지 뚫고 간다. 발목에 통증은 나의 친구.
18:38 하랑대디님이 도청에서 출발했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 왔다. 중간에서 만나서 목포까지 동반주를 하면 된다. 공산면사무소를 떠나 뛰다 걷다 뛰다 걷다 대략 십 여 킬로미터는 온 거 같은데 지도앱을 켜서 현 위치를 보니 아직 대전리다.
몽탄대교까지는 직선거리로 십 여 킬로미터 안팎으로 남은 듯싶다. 시간은 저녁 7시가 되어 간다. 이제 한 시간 여 후면 어둠이 내려올 텐데 그 전에 몽탄대교까지 갈 수 있을까? 보통 컨디션이라면 10킬로미터 정도야 한 시간 안에 충분히 달려 가고도 남는 거리일 텐데 말이다.
나는 마라톤을 시작하고 반 년 만에 10킬로미터를 50분 이내로 주파했었다. 그러고 보면 재능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 거다. 마라톤 카페 첫 정모를 하고 그 다음 달 광복절에 열린 10킬로미터 마라톤 대회 참가 기록은 약 47분이었다. 킬로미터당 4분 40초 페이스. 나도 놀라고 같이 달린 고수들도 놀랐다. 독립군치고는 놀라운 실력이라고 했다. 체계적인 훈련만 좀 더 하면 기록이 많이 단축될 거라고 다들 그랬다.
시간이 지날수록 달리기에 재미가 더 해가고 카페도 열기를 더 해 갔다. 카페 고수들이 방장은 서브 쓰리에 도전해야 한다고 바람을 넣었다. 혼자 연습해서 뛴 10킬로미터 공식대회에서 47분이라는 건 재능이 있다고 한껏 추켜 세우는 통에 말도 안되는 서브 쓰리 도전을 공언해 버리고 훈련에 몰입했었다.
돌이켜 봤을 때 인생에 있어 어느 한 순간 어느 하나에 미칠 수 있다면 그 또한 행복한 삶이 아닐까?
18:57 이런 속도로는 하랑대디님과 약속한 시간을 못 맞출 것이다. 몽탄대교에서 목포까지는 약 17킬로미터다. 그러면 추가로 3시간. 너무 늦다. 나의 서부종주 국토일주가 이제 22킬로미터만 이동하면 끝나는데 피날레를 장식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 악물고 뛰어 본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예리한 칼날이 발목을 베어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심장까지 전해져 오지만 그래도 후회없이 뛴다. 누가 옆에서 같이 뛰는 것이 느껴진다. 흰 옷입은 그 어린아이다. 언제 왔니? 아이는 매번 그랬듯이 말없이 미소만 짓는다. 너 좀 뛰는 구나. 그래, 같이 뛰자.
뛰는 속도를 계산해 보니 몽탄대교를 지나 당호제 정도에서 하랑대디님을 만날 것 같다. 거기서 10여 킬로미터만 같이 가면 서부종주는 완성이다. 힘을 내자.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해 보자. 뛰어 보는거야.
앞에서 할머니 두 분이 걸어오시다가 이상한 복장을 하고 뛰어가는 나를 보더니 표정이 굳어서 발걸음을 딱 멈춘다. 혹시라도 놀라게 해드렸을까봐 나름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드니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따라 손을 흔드신다. 가까이 마주쳐서는 배에 달린 부착물을 읽고선 화이팅을 외쳐주신다. 할머니 덕분에 다시 나는 또 달려간다.
이제 주위는 서서히 어둠의 장막이 깔릴 채비를 하고 있다. 서쪽 하늘 빛이 발갛게 물들어 가고 있다.
19:27 숨이 정수리에서 논다. 숨이 턱까지 차다가 정수리까지 올라가면 마치 마취제를 맞은 것처럼 무아지경이 된다. 옆에 같이 뛰던 흰 옷 입은 어린아이는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아무래도 좋다. 이 자체가 좋지 아니한가?
멀리서 누군가가 이런 내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 기가 막힌 작품이 나올 것이다.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먹이를 찾아 달리는 한 마리의 치타 같지 않을까?
저 앞에 다리 같은 것이 하나 보인다. 저것이 몽탄대교일 것이다. 그래 다 왔다.
사달이 난 건 그 순간이었다. 오른발을 내딛는 순간 돌멩이를 잘 못 밟았는지 체중이 실린 오른발목이 90도로 뚝 꺾이면서 몸이 빙글 돌았다. 으악 소리도 못 내고 바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벌겋게 변해가던 하늘이 내 눈에서 빙글 빙글 돌며 노랗게 변하고 있었다.
마라톤 훈련 중이었다. 남산 도로 중간부분에서 나는 발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파틀렉*을 하던 중 발을 헛딛는 바람에 몇 바퀴를 굴러 멈췄다. 무릎이 좀 까진 것은 둘째치고 발목이 돌아 간 것 같다. 과욕이었다. 너무 의욕이 넘쳐 내리막에서 속도를 너무 내다가 다리 근력이 버티지를 못했다.
펜스 옆으로 기어가서 꺾인 오른 발목을 살살 돌려 보았다. 다행히도 뼈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다. 아마도 인대가 놀랐으리라.
일어나서 슬슬 걸어보니 그냥 저냥 걸을 만은 하다. 다행이다. 하지만 무릎도 깨지고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하고 마쳐야겠다. 그러고 보면 요 근래 마라톤에 미쳐서 내 자신을 심하게 몰아 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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