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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8일 수요일, 열 번째

 

 

곤궁이통(困窮而通), ()하면 통()한다고 했다.

10킬로미터 대회에서 50분 이내 기록을 낸 후 마라톤에 집중하면서 관련 책자와 사이트 그리고 우리나라 마라톤 국가대표를 지냈던 선수들을 찾아 다니면서 마라톤 훈련에 대해 배우고 그대로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마추어가 열정을 갖고 마라톤을 하고자 하는 모습에 기꺼이 본인의 시간을 내주고 훈련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장거리를 뛰기 위해서는 지구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거지만 기록을 올리려면 단거리 스피드 훈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기 위한 첫 번째 목표는 1킬로미터를 4분 이내로 뛸 수 있는 근력을 갖추는 것.

이제까지의 숏컷주법이 아닌 스트라이즈주법으로 골반을 이용해서 보폭을 넓게 달리는 훈련과 뒤꿈치 착지가 아닌 가운데 발바닥 착지 주법을 훈련했다. 그러기 위해서 인터벌과 크로스컨트리, 파틀렉 훈련을 격일로 실시했다. 뛰다 보면 매번 숨이 머리끝까지 차오르고 입에는 쇠 맛이 나곤 했다.

 

 

매일 2시간씩 그렇게 내 자신을 몰아 부쳤다. 마라톤은 내 인생의 전부가 되어 가고 있었다. 부상을 달고 사는 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 들이고 있었다

 

 

저 앞에 다리 같은 것이 하나 보인다. 저것이 몽탄대교일 것이다. 그래 다 왔다.

 

사달이 난 건 그 순간이었다. 오른발을 내딛는 순간 돌멩이를 잘 못 밟았는지 체중이 실린 오른발목이 90도로 뚝 꺾이면서 몸이 빙글 돌았다. 으악 소리도 못 내고 바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벌겋게 변해가던 하늘이 내 눈에서 빙글 빙글 돌며 노랗게 변하고 있었다.

 

19:28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 이보다 심한 적도 있었다.

뼈가 부러졌나 싶어 가만 앉아서 조심스럽게 신발끈을 풀고 뒤꿈치부터 천천히 벗겨나갔다. 조금만 움직여도 상상을 초월하는 통증이 온 몸을 휘감았다.

아악, 씨팔!

주위에 사람도 없겠다 냅다 소리를 질러댔다. 숨을 고르고 나서 눈을 부릅떳다.

, 힘내야 해. 다음은 양말이다. 발목을 최대한 고정시키고 아주 조심스럽게 벗기기 시작했다.

휴우 휴우 너무 아파서 호흡이 조절되지 않는다. 퉁퉁 부은 발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벌에 쏘인 듯 부풀어 올랐다. 발을 잡고 살살 돌려 본다. 통증이 온 몸을 감싸지만 골절된 것 같지는 않는다. 다행이다. 하지만 걸을 수는 있을까?

, 막판에 이게 뭐람. 잠시 멍하니 있다가 하랑대디님한테 다시 문자를 보냈다.


지금 몽탄대교 앞인데 도저히 걸을 수도 없네요. 몽탄대교까지 오셔야 될 것 같아요.

바로 답변이 왔다.

, 조금만 기다리세요. 지금 뛰어 가고 있습니다.

 

19:36 하랑대디님이 대략 6분 페이스로 뛰어 온다고 가정했을 때 앞으로 30분은 족히 걸릴 것이다.

키네시오 테이프를 오른 발목에 압박붕대처럼 칭칭 감고는 슬로우 비디오로 양말과 신발을 신고 일어나 본다. 엉뚱한 용도지만 키네시오 테이프가 압박붕대 역할을 잘해주고 있다.

 

절름발이로 걸어 보는데 오른 발을 디딜 때마다 발목을 망치로 때리는 듯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느껴 진다. 백여 걸음 이동하다 보니 어느덧 통증 참는데 이골이 났는지 또 걸어 진다.

이놈의 몽탄대교는 내가 건너 보고 드러누으리라.

절뚝절뚝거리며 몽탄대교를 건넌다. 며칠 전 국토일주 4일차 밤 익산에서는 깽깽이로 몇 백 걸음도 갔었다. 이 정도야.

 

저기 저 멀리 해가 깝북깝북 산 너머로 떨어지고 있다. 주변을 둘러싼 산들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내 의지가 불타고 있었다.

 

19:55 몽탄대교를 건너 이를 악물고 조금 걷다 보니 앞에 큰 음식점이 보이는데 명산장어집이라고 써져 있다.

 

 

에고 뭐가 됐든 그냥 들어가자.

다짜고짜 들어가서 방 달라고 하고는 들어가서 누웠다. 서부종주는 여기서 끝이다. 목포터미날까지 아쉬운 17킬로미터여 안녕. 국토일주 첫 날 6 1일부터 오늘까지 8일동안 잘 달려 왔다.

후회없다. 후회없으면 됐다.

 

시간을 보니 저녁 8시가 거의 다 됐다. 이제 20여 분 있으면 하랑대디님이 도착하겠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하랑대디님이다. 몽탄대교에 거의 다 왔단다.

아니 이렇게 빨리 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닌데, 15킬로미터 남았다고 문자가 온지 한 시간 여 만이다.

 

 

명산장어집에 있다고 말하니 바로 입구에서 전화를 받았었는지 금방 방으로 들어 왔다.

들어 오자 마자 배낭을 풀러 나를 위해 준비한 갖가지 단백질음료수와 보충음식 그리고 키네시오 테이프 등등을 꺼내 놓는다.

아니 이걸 다 들고 뛰어서 여기까지 온 거야?

알고 보니 거의 반 마라톤선수다. 4분 페이스로 15킬로미터를 뛰어 왔단다. 그래 아무튼 반갑다. 마라톤이 동일한 주제라 이야기 꽃이 금방 활짝 핀다. 발목 아픈 것도 잊게 만드는 묘한 힘이다. 또 알고 보니 동갑이다. 국토일주가 뭐라고 나를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하랑대디님이 너무도 고맙다. 기분이 절로 난다.

 

에잇, 우리 술 한잔 하자.

소주랑 맥주를 시켜서 소맥을 만들어 마셨다. 장어와 소맥이라 맛이 일품이다.

 

 

서부종주 마지막 시간, 처음 보는 동갑내기 마라톤 친구와 함께 할 수 있는 이런 인연을 어디 가서 또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알코올이 들어가니 정신이 알딸딸하다. 원래 못 마시는 술이지만 마라톤 친구와 함께라 주력에 맞춰 잘도 달린다. 다리로만 달려야 달릴 주()자 주력인가, 술로 달려도 술 주()자 주력인 것을.

지금 나와 하랑대디와 지난 동아마라톤대회도 같이 달리고 올해 춘천마라톤대회도 같이 달리고 있다. 얼굴은 처음 보지만 우리는 동시대에 동일장소에서 함께 했고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기에 항상 함께다. 내가 술을 마시고 술이 나를 마신다.

 

내가 먼저 음식값을 계산한 걸 알고는 하랑대디가 내 호주머니에 돈을 찔러 넣는다. 한사코 거부하다가 그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알겠다고 받았다.

다음에 서울 오거들랑 내가 진짜 맛난 거 사주마.

짐 챙겨 방에서 나와 마라톤 카페의 공식 포즈인 똥꾸힘 자세로 사진 한방 같이 찍고, 콜택시를 불러 목포로 고고. 

 

 

 21:45 택시 안에서 부산가는 차편을 예매했다. 오래달리기님이 알려준 대로 목포에서 오송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부산가는 차편밖에 없다. 목포에서 출발시간 새벽 5 25분이 첫차다.

이제 목포에서 하룻밤 자고 새벽같이 부산으로 가서 동부종주를 시작하리라.

 

최종 목적지인 목포까지 15킬로미터 남기고 중단했지만 후회는 없다. 남김없이 열정을 쏟아 부었고 미친 듯이 정열을 불태웠다.

눈거풀이 감기고 술기운이 올라온다. 목포역에 내려 제일 먼저 보이는 여관에 들어가 자야겠다.

 

덜컹거리는 택시 창문 밖 흔들리는 네온사인 불빛 사이로 목포의 야경이 너울너울 춤추고 있었다.

 

 

8일차 경로: 광주시청-전남 나주시청(27km)–무안군몽탄대교(30km) 57km

 

 

Photo by Takashi Kitajima

 

 

 

 "미래는 자신의 꿈을 믿는 사람들의 것이다."

 

엘리노어 루즈벨트 (Eleanor Roosevelt, 미국 32대 영부인)

 

 

계속해서 앨리노어 루즈벨트는 이야기한다.

 

"행복은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잘 살았던 삶의 부산물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의 선택이다. 

어제는 역사이다. 

내일은 미스터리다.

오늘은 선물(Gift)이다. 

그래서 선물(Present)라고 불린다.

만일 인생이 예측 가능하다면 그것은 인생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풍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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