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 토요일, 네 번째 16:37 이제 익산으로 간다. 한 낮인데도 비가 오니 더위 걱정은 없다. 땡볕 때문에 고생할 일은 없는 셈이다. 이 정도 날씨라면 30킬로미터쯤이야 뭐. 비가 계속 추적 추적 내린다. 아, 내 종이지도. 배낭 뒤 바깥 주머니에 꽂아 놓았던 종이지도가 꽤 많이 젖었다. 배낭이 꽉 차서 안쪽에 못 넣었는데 생각을 못 했다. 젓갈 가게 길을 지나가다가 비닐봉지 하나 얻어서 종이지도를 감싸서 젖지 않도록 하고 다시 출발했다. 그칠 비가 아니다. 하지만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나는 간다. 17:55 지금 한 시간 반 동안 비 속을 뚫고 달리고 있다. 신발 속이 질퍽해져서 딛일 때마다 퍽퍽거리는 느낌이 영 좋지 않다. 비가 와서 그런지 국도에 달리는 차들의 속도가 더 빠르게 느껴진다. ..
6월 4일 토요일, 세 번째 12:01 정오가 넘어 간다. 부슬비 내리는 둑방길을 그 아름다움에 상념에 취해 몇 시간 이동하다 보니 어느덧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산 사이로 도심이 보인다. 성냥각 같은 모양새가 모여있는 것이 틀림없이 빌딩들이다. 오늘 중간 목적지인 강경읍내가 맞다면 거의 30킬로미터를 이동해 온 셈이다. 그래도 자전거길을 따라 이동하니 길을 찾지 않아도 되어 체력이 완전 바닥은 아니다. 마지막 힘을 내 본다. 금강 종주 자전거길은 구간마다 스타일이 다양하다. 지금 여기 길은 직선으로 수 킬로미터다. 가도 가도 똑 같은 길이 이어져 있다. 12:05 저기 길 끝에 조그마한 점이 보인다. 더 가보니 사람이쪼그리고 앉아 있다.가만 보니 핸드폰으로 나를 찍는 것도 같다. 그리고는 갑자기 일어..
6월 4일 토요일, 두 번째 09:00 국도를 따라 가다가 빠져 나와서 드넓은 벌판 길로 들어 섰다. 뛰다 걷다 뛰다 걷다 반복하기를 수십 차례다. 지친다. 가로질러 가는 건 계속 길을 찾아 가야 하기 때문에 정신력이 많이 소모된다. 가다 보니 표지판이 하나 보인다. 공사 중 50미터 앞. 뭐지 이건? 설마 하면서 가보니 아 우려하던 일이 발생했다. 국토일주하면서 제일 싫은 것이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일이다. 설마 했는데 위험을 알리는 표지판 두 개가단호함이 서려있는 문구와 함께 길 한 가운데 떡 하니 버티고 서있다. 위험! 펌프장 공사중으로 통행을 차단하오니 우회하여 주십시오. 오른쪽은 표현이 그나마 조금 부드러웠다. 공사 중 출입금지. 통행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 어떻게 여기까지 ..
6월 4일 토요일. 국토일주 나흗날, 금강따라 전라도를 향하여 목표경로: 청양군 청남초중학교–부여-논산시 강경읍(30km)-전북 익산시청(30km) 총 60km 6월 4일 토요일, 첫 번째 06:10 몸이 힘들어서 그런 건지 악몽을 꾸었다. 국토일주를 하면서 육체적으로 힘들 때 마다 과거 내 인생 가장 힘들었던 그 날로 돌아가곤 한다. 마치 지난 십 여 년 동안 마음 한 켠에 무겁게 짓누르던 기억들을 마지막으로 남김없이 꺼내어 날려 보내려는 듯이 말이다. 어제 꿈이 선명하다. 경제적 파산선고에 이어 폐결핵은 내게 정신적 피폐함과 육체적 굴욕감을 가져왔다. 병은 대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폐결핵에 걸리고 몇 개월이 지나 해가 바뀐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새하얀 눈이 펄펄 내리던 정초, 세상..
6월 3일 금요일, 일곱 번째 20:26 그래 그건 피였다. 새빨간 피. 나는 그 때 그 시큼한 쇠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 또 다시 피를 토한다 해도 아마 놀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숨이 너무 가쁘다. 온 몸의 철분이 숨통을 통해서 다 빠져 나간 느낌이다. 지금 내 피를 검사해 보면 헤모글로빈에 철 성분이 하나도 없겠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철 성분이 없어 죽을 수도 있을까? 머리가 어지럽다. 다리가 휘청거린다. 이제 달리는 건지 걷고 있는 건지 구분이 안된다. 20:54 저 멀리 불빛이 보인다. 이번에는 불빛이 모여 있다. 지금까지 보았던 불빛과는 다르다. 지도 앱을 보니 요 근처가 청남 초중학교로 나오는 것이 이제 다 왔다 보다. 이를 악물고 다시 달린다. 거의 깽깽이 수준이다. 저멀..
6월 3일 금요일, 여섯 번째 19:52 좀 어둡다 싶더니 어느덧 해가 떨어진다. 산 뒤쪽 하늘이 벌겋게 물들어 간다. 이럴 때는 노을이 무섭다. 이제 금방 사방이 시커멓게 될 것이다. 정신 없이 도로 따라 논두렁 따라 가다 보니 다시 산길이다. 큰일이다. 갑자기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이제 더 이상 서있을 힘도 없는데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상태에서 노숙을 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체력이 완전히 방전된 상태에서 두려움은 수 십 배로 커진다. 해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청남 초중학교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지도 앱을 켜고 현재 위치에서 청남 초중학교까지 거리를 재보니 대략 7킬로미터 가량 남았다. 평상시였으면 4분 페이스로 30분이면 뛰어갈 수 ..
힘내요! 멈추지 말아요! 15:03 알겠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눈이 떠졌다. 6월 3일 금요일, 다섯 번째 이야기 꿈이다. 어느 정도 잤을까? 입구에 사람 목소리가 시끄러운 것이 이제야 손님들이 들어 오나 보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다. 어휴, 2시간을 넘게 잠을 잤다. 유구에서 5시간을 넘게 보낸 셈이다. 목이 마르다. 정수기로 걸어가려는데 다리가 저려서 한참을 주무르다가 일어났다. 대체 꿈에서도 달리다니. 어느 대회장이었을까? 포기하려 할 때 멈추지 말라고 소리지르던 그 아이는 누구였을까?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 버려 본다. 체력이 떨어져서 그런지 며칠 째 달리기만 해서 그런지 잠만 들면 달리는 꿈이다. 아직 해는 떨어지지 않았지만 마음이 급해진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것 같아 주섬주섬 옷을 ..
6월 3일 금요일, 네 번째 09:43 드디어 유구읍내에 입성했다. 도로가 깨끗하다. 이제 여기서 충분히 쉬다가 해가 떨어질 때쯤 다시 출발하리라. 오늘은 야간주를 각오해야겠다. 이제 땡볕주는 다시는 안 한다. 여기 유구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화상 입은 다리도 치료해야 한다. 마침 약국이 보인다. 약사 아저씨가 벌겋게 익은 다리를 보더니 1도 화상이라며 바르는 약을 주면서 더 이상 햇빛을 쐬면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저도 알아요, 그런데 저는 국토일주를 해야 한다구요. 약국 문을 나서는데 다리에 썬크림 꼭 바르라는 약사 아저씨의 경고가 다시 한번 뒤통수에 꽂혔다. 환자를 걱정해 주시는 마음이 지극 정성인 약사 아저씨다. 10:05 일단 뭘 좀 먹어야겠다. 읍사무소 주변까지 가니 제법 음식점도 많..
6월 3일 금요일, 세 번째 갈 길은 멀지만 그래도 궁금증이 일어 석상이 있는 언덕을 힘차게 뛰어 올라가 본다. 언덕 위에도 별다른 건물은 없고 이제는 사람 키만한 불상이 수 백 여 개가 양 길가에 서 있다. 가파른 길 입구에 서있던 거대 석상은 길을 지키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여기 불상은 이 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란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다. 조금만 더 가면 절이라도 나올 듯싶은데 시간이 너무 지체된 것 같아 발길을 돌렸다. 갖가지 모양을 하고 있는 수 백 여 개의 불상을 향해 두 손을 마주하고 고개 숙여 부탁을 해본다. 이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를 찾는 많은 이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행해 주시고 제 앞으로 남은 국토일주 여정 동안 잘 보살펴 주세요. 제가 가진 것이 없어 드릴 건 없지만 마..
6월 3일 금요일, 두 번째 06:10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국도를 달려 나간다. 여명이 밝아오면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같이 달린다. 국토일주 3일차가 되어 몸이 적응을 했는지 간 밤에 잠을 푹 자서 그런지 다리가 앞으로 쭉쭉 잘 나간다. 유구읍까지 20여킬로미터는 그냥 가겠다. 어스름하던 주변이 금방 환해진다. 길 양쪽으로 산과 들, 논과 밭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낯설다. 오감을 통해 느끼는 모든 것들이 그냥 새롭기만 하다. 사람도 거리도 장소도 모든 것이 다 처음 보는 거고 처음 느끼는 것이다. 매시 매분 매초가 다 신기하다. 살결에 부딪히는 시골 바람도 청량하기만 하고 파릇한 수풀 냄새와 논밭의 두엄 냄새도 향긋하다. 이런 모든 낯선 느낌을 사랑한다. 비록 일정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