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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7일 화요일, 여덟 번째

 

 

21:13 십여 년도 더 지난 첫 마라톤 풀코스 대회가 계속 생각난다. 몸이 힘드니 그 동안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만 어여 가자. 

도심을 일직선으로 관통하여 한참을 달려가니 광주시청이 나오고, 좀 더 지나니 아파트촌을 지나 마지막 유흥가에 도달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광주를 빠져나가는 길이다.  

 

오늘 발목에 죽은 피를 빼서 그런지 소염진통제를 먹어서 그런지 마지막에 진도를 많이 뺐다.

오늘은 나를 위해서 몸 보신을 해야겠다.

앉아서 쉴 수 있는 식당에 들어가 물병 하나를 단숨에 마셔버리고 저녁식사로 삼계탕을 시켰다.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니 졸리다. 빨리 잘 곳을 찾아서 엎어져 자야겠다는 생각에 가까운 여관방을 찾아 들어갔다. 온 몸에 땀냄새가 진동을 하는 것이 역겨울 정도로 숨쉬기가 곤란하다. 빨래를 해야겠다. 좀비처럼 훌러덩 훌러덩 옷을 벗고 벌게 벗은 몸으로 화장실에 들어가서 손빨래를 한다. 이제 일상이다.

손으로 대충 짜서 옷걸이에 걸어 놓으니 왠지 오늘 하루 일을 모두 마감한 듯한 느낌이 든다.

 



22:14 여관방 침대에 엎어져 있는데 타지의 낯설음에 눈만 껌벅껌벅 잠이 안 온다.

이제 내일 하루 목포까지 달려가면 서부종주가 마무리된다. 그러고 보니 시간 참 빠르다. 벌써 몇 시간 후면 국토일주 8일차라니.

 

SNS에서는 그 간 일지를 공유하면서 동부종주 때 동반주 하겠다는 분들이 많아졌다. 이 힘든 걸 왜 하려고 할까? 내가 오히려 궁금하다. 많은 이들이 나한테 물어 보는 질문을 이젠 거꾸로 내가 그들에게 물어 보고 싶다. 죽을 것처럼 힘들다고 글을 올리건만 왜 자꾸 온다고 그럴까? 정 온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도 너무 준비 없이 와서 고생만 진탕하고 가거나 또는 동반주하다가 안전사고가 날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서 글을 몇 자 적어 올렸다. 

 

국토일주 동반주 오실 분이 알았으면 하는 내용 올립니다.

배낭에 꼭 챙겨 오실 것은 물통, 야광조끼, 헤드랜턴, 썬크림, 여분의 양말과 팬티 그리고 상의, 우비(또는 방풍상의), 모자(햇빛가리기 포함), 핸드폰, 충전기, 예비배터리, 러닝시계 등입니다.

배낭은 메고 뛸 수 있는 조끼배낭이어야 하구요. 무게는 5킬로미터 이내로 꾸려 주세요. 무게가 적으면 적을 수록 좋습니다.

상의는 긴팔상의 하나는 꼭 있어야 합니다. 반 팔 입으면 햇볕에 다 타요. 또한 밤 중에 식별이 용이하도록 밝은 색을 입어야 합니다.

하의의 경우 저는 제 성향상 러닝팬티를 고집했지만 태양에 노출되어 화상을 입었습니다. 물론 썬크림을 제대로 바르지 않아 그런 것도 있었지만, 잘 판단해서 긴타이즈를 입는 것을 고려하셔요.

신발의 경우 가장 편한 레이스화를 신어야 합니다. 새로 산 신발을 바로 신으면 익숙하지 않아 물집이 잡히는 등 고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는 문제, 국토일주는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비박을 하거나 찜질방에서 자는 것은 삼가고, 반드시 여관이나 모텔에서 잡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즐겨야 합니다. 고통과 어려움을 즐기지 못하면 극기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발생하는 모든 상황에 대해서 즐길 준비가 되어 있으신 분만 동반주하러 오시길 바라겠습니다.

 

글을 올리고 나니 긴장이 완전히 풀어져 손 하나 까딱하기가 싫다. 몸이 마치 젖은 솜처럼 침대 속으로 스며든다. 눈꺼풀이 무겁다.

사람은 참 신기도 하지.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고, 지금 이 상태에서 꼼짝도 못하겠다. 그래, 이렇게 온 몸의 힘이 없을 때 바닥에 드러눕는 그 느낌, 나는 그 느낌을 아직도 기억한다. 아니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에서 내 삶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준 마라톤, 첫 풀코스 인천마라톤대회.

그러고 보면 당시의 심정은 지금 국토일주를 임하는 마음과 같다. 인생은 반복되는가? 회상을 하는 건지 꿈을 꾸는 건지 모호한 경계선에서 나는 또 달리고 있다.

 

 


한참을 가다가 또 잔디밭에 드러누웠다. 38킬로미터 지점에 온 것 같다. 이제 4킬로미터만 가면 되는데 더 이상 뛴다는 것은 이제 무리란 판단이 들었다.

아파트 잔디밭에 내리쬐는 햇살이 참으로 따사롭다. 문득 엉뚱하게도 아! 얼굴 많이 타겠다 란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누워있다가 다시 일어나 걸어 본다.

 

이제 40킬로미터인지 41킬로미터 지점 인지 모르겠지만 멀찌감치 경기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 정말 완주다.

시간을 보니 5시간이 훨씬 넘어 5시간 20분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회 운영국은 정말 모두 철수했나 보다. 마라톤 코스를 안내 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이제는 경기장을 향해 가로질러 갈 수 밖에 없다.

 

고가 아래 신호등을 건너 경기장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는 길목에서는 다 뛰고 나서 집으로 발걸음을 향하는 참가자들 수 백 명이 쏟아져 내려 오고 있었다.

이제 다 왔어요! 조금만 힘내세요! 고생했네요! 파이팅!

마주치는 달림이들마다 배에 부착한 마라톤 배번을 보고 연신 파이팅을 외쳐 댔다. 처음에는 왠지 쑥스럽지만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어느덧 대꾸를 하는 것도 숨쉬는 것도 일처럼 느껴졌다.

이제 막 경기장 안으로 진입하려는 순간이었다.

 

자기야!

수많은 인파 속 웅성거리는 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인가?

자기야!

또 들렸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건 분명 아내 목소리다. 두리번거리다 보니 저 먼발치에 누군가 인파를 헤치고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아내다. 세 살배기 아들녀석을 안고 마중을 나왔다. 오늘 못 온다고 했었는데. 가슴 속에서 묵직하고 뭉클한 무언가가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 조금만 더 가면 완주하거든? 조금만 기다려!

씩씩하게 말하곤 마지막 언덕길을 힘차게 뛰어 올라갔다. 나도 모르게 없던 힘이 솟아 올랐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트랙을 한 바퀴 돌고 찍힌 시간은 5시간 36. 나의 첫 풀코스 마라톤 대회 기록이다.

 

마라톤도 인생도 끝까지 완주하는 그런 재미가 있어 해볼만 하고 살 만하다. 포기만 하지 않으면 된다.

 

 

7일차 경로: 전북고창전남 장성읍(20km)-광주시청(20km) 40km

 

 

 

"용기란 죽을만큼 두려워도 일단 한 번 해보는 것이다."

 

존 웨인 (John Wayne, 영화인)

 

 

우리에게 생명에 위협은 없지만 죽을만큼 두려운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 수 십명 또는 수 백명이 모인 자리 앞에 나가서 말하는 일, 내가 잘 모르는 장소나 잘 모르는 모임에 가는 일, 외국인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일, 준비 안한 시험을 봐야 하는 일, 거절을 당할 것이 뻔한 사람한테 가서 영업해야 하는 일,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는 일.

어쩌면 죽을 것처럼 피하고 싶은 순간이지만 막상 해보면 죽지 않는 일이고, 결과 유무를 떠나 별거 아닌 일이 된다. 일단 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될까 안될까 고민하지 말고 하기로 결정했으면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해라. 그것이 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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