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7일 화요일, 여섯 번째 장성읍도 꽤 크다. 빠져나가는데 한참 걸린다. 아, 내가 뛰지 못하고 걸어서 그런가 싶다. 이제 좀 한적하니 금방 논길이 나올 것 같은 장소에 무슨 터미널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정형외과가 눈에 들어 온다. 노란색만 생각하면 주변에 온통 노란색만 보인다고 계속 뼈 생각을 하다 보니 정형외과가 어떻게 눈에 쏙 들어 왔다. 그래 한의원에서 진찰을 받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 외과도 들려 보자. 그 동안 혹시나 피로골절은 아닐까 반신반의 하면서 왔는데 이번에 확실히 검사를 받아 봐야겠다. 아니길 빌자. 만일 뼈에 문제가 있는데 강행한다면 그건 용기가 아니고 무모한 객기다. 여기서 과감히 접는다. 17:10 병원문을 열고 들어가니 복도에 조그마한 유리창문이 열려 있고, 그 안에 간호..
6월 7일 화요일, 다섯 번째 십 여 분 기다리고 있는데 진동이 온다. 도착했는데 어디냐는 이공이공님 전화다. 건물을 묘사하고 있는 자리를 설명하니 서로 다른 말을 한다. 이런, 장성읍에 장성인터체인지가 두 군데였구나. 금방 다시 돌아 오겠노라고 한다. 괜스레 미안하다. 12:32 조금 앉아 있다 보니 인터체인지 맞은 편 길 건너 손 흔드는 사람이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냅다 건너가 앞 좌석에 탔다. 처음 보는 나를 만나려고 출근도 마다하고 고속도로를 빙빙 돌아 여기까지 와 준 카페회원님에게 어떻게 고마움을 표할 수 있을까? 찰라 뒤에서 안녕하세요, 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뒤돌아 보니 여성 분 두 명이 있다. 이공이공님 아내와 친구분인데 국토일주하는 사람 만난다고 하니 신기하다고 같이 왔단다. 이건..
6월 7일 화요일, 네 번째 지나간다, 지나간다, 이제 바로 뒤다. 이 팽팽한 긴장감, 이 기분, 이 느낌. 나는 황홀경에 빠져든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을 달리고 있다. 빠앙, 하는 트럭의 경적소리와 함께 불어 닥친 회오리바람에 몸이 순간 붕 뜨는 느낌이 들면서 또다시 옆 터널 벽에 부딪힌다. 동시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왼 손등을 후려치고 지나갔다. 아마도 트럭이 지나가며 바퀴에 돌멩이가 튕겨졌으리라.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다. 주먹이 들어갈 정도 사이로 트럭이 지나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달리며 12년 전 나의 첫 풀코스 마라톤대회장에 다녀 온 것일까? 손등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휴, 왼손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았더라면 얼굴에 큰 상처가 났을 뻔했다. 저 ..
6월 7일 화요일, 세 번째 고속도로다. 철조망 너머 고속도로가 있다. 그렇게 찾던 고창담양고속도로가 틀림없다. 산 능선에서 고속도로를 만나다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을까? 철조망을 타고 넘을까 하다가 혹시 하는 마음에 철조망 따라 옆으로 쭉 가보니 아래 작은 개구멍이 있다. 산속 동물들이 이용하는 구멍같다. 개구멍으로 철망을 통과하여 고속도로를 따라 이동한다. 그래 이 도로를 조금만 타면 금방 장성읍에 도착할 것이다. 불행이냐 다행이냐. 11:18 몇 백 미터 이동을 하는데 저 멀리 굴이 보인다. 아니 저건? 터널이다. 젠장, 또 터널이야? 몇 분간 고민하다가 결정 내렸다. 어쩔 수 없다. 통과해야지 이제 와서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페이스북과 마라톤 카페에 산 위에서..
6월 7일 화요일, 두 번째 고속도로로 가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지도 앱을 보니 저기 산길 따라 고개 하나 넘으면 고속도로와 마주칠 것 같다. 10:23 그런데 꾸불꾸불 산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서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고속도로가 나올 기미가 안 보인다. 뭐 어딘가 가려져 있겠지. 그런데 어라, 이상하다. 이쯤 나와야 할 텐데. 지도 앱을 켜고 현 위치를 보니 이쯤에서 고속도로와 교차했어야 했다. 신기한 일이다. 고속도로가 사라졌다. 어리둥절하면서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아니 별 희한한 경우가 다 있다. 같은 주유소 세 번 본 건 밤에 뭐에 홀려서 그렇다고 쳐도, 낮에 도로가 없어지는 경우는 또 뭔가? 황당한 마음으로 지도만 들어다 보고 있는데 트랙터가 탈탈탈거리며 내 옆을 지나간다. 힐끔 보니..
6월 7일 화요일, 국토종주 이렛날, 고창에서 나주까지 갈 수 있을까 수정 목표: 전북고창–전남 장성읍(20km)-광주시청(20km)-전남 나주시청(24km) 총 64km 6월 7일 화요일, 첫 번째 07:38 늦잠을 잤다. 어제 밤 꿈 속에서도 계속 뛰다가 깨어났다. 요즘은 잠을 푹 자지 못한다. 잘 때마다 꿈을 꾸고 꿈에서도 계속 달리다가 깨어난다.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려고 오른쪽 발을 바닥에 딛는데 으악! 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침대에 다시 기어 올라가 왼쪽 오른쪽 발목을 비교해 보니 오른쪽 인대부분을 눌러 볼 때마다 엄청난 통증이 급습해 온다. 뭔가 사달이 난 건가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마라톤 경력 십 여 년이 넘도록 트레일런을 하건 울트라 마라톤을 뛰건 이런 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6월 6일 월요일, 여섯 번째 21:25 몇 발자국 안가 그 불빛의 정체를 알아냈다. 모텔이다. 오! 이런 산 속에 모텔이라니. 오 하느님, 오 맙소사 살았다. 우연찮게 손에 잡힌 나무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기어 기어 모텔 앞까지 도달했다. 이름도 맙소사, 워커힐모텔이래. 하루 자려고 하는데 방 있나요? 제가 국토일주 중이라 예산이 한정되어 있어서요. 저렴한 방으로 주세요. 22:25 눈이 스르르 잠기는 것이 느껴진다. 긴장이 풀리니 몸이 젖은 솜이 되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든다.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달린다. 나는 알고 있다. 이건 꿈이다. 그런데 바로 옆에 누가 나란히 달리고 있다. 꿈 속 한강대교에서 내 옆에 서 있던 바가지 머리 흰 티셔츠의 어린아이다. 속도를 내보지만 그 어린아이는 여전히 내 ..
6월 6일 월요일, 다섯 번째 나는 달리고 있다. 마라톤대회 풀코스를 신청하고 나서 아침마다 한강까지 달려갔다 오기로 한 첫 날이다. 집에서 4킬로미터가 채 안 되는 거리다. 저 멀리 여의도로 넘어 가는 다리가 보인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런데 너무 힘들다. 다리가 무겁고 숨도 가빠져 온다. 더 이상 못 뛰겠다. 다리가 딱 얼어붙어 떨어지지가 않는다.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이게 웬일인가. 멈춰서 다리를 주물러 본다. 똑바로 서서 다리를 쭉 펴고 몸을 아래로 구부려 허벅지근육과 종아리근육을 이완시키기를 몇 분. 소용이 없다. 주말이라 그런지 길거리에 사람은 없다. 배도 고프다. 문 연 음식점도 없다. 조금씩 걸어 본다. 왼쪽 다리는 견딜만 한데 오른쪽 다리는 영 신통찮다. 몇 백 미터가 마치 수십 ..
6월 6일 월요일, 네 번째 19:00 이제 모든 것이 초월상태이다. 궁둥이 사이 살이 쓰라린 것도 찢어지는 듯한 발목인대와 아킬레스건의 통증도 바늘로 찌르는 듯한 발바닥 아픔도 발가락의 물집도 죄다 국토일주 동안 나와 함께 할 녀석들이다. 이 놈들은 무지 질겨서 나를 떠나려 하지도 않는다. 걷고 달리는 내내 극심한 통증 이 놈들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지지만 그래도 화가 나거나 분노가 치밀어 오르진 않는다. 단지발목이 피로골절 상태로 가서 이 여행을 포기하게끔만 안되길 바랄 뿐이다. 국도가 고창까지 직선으로 나 있으니 이 길만 따라가면 된다. 어느덧 주변이 벌게 진다. 땅 거미가 도로에 짙게 드리워 지기 시작하면 그 아름다운 풍경과는 별개로 나는 마음이 조급해져 온다. 이제 어스름이 지나면 세상에 검정 보..
6월 6일 월요일, 세 번째 13:43 순간 잠이 들었나 보다. 발가벗고 한 시간을 넘게 자버리다니. 몸이 식어서 으슬 으슬 춥다. 다시 온탕으로 들어가서 몸을 덥힌다. 12년 전 무모하기만 했던 마라톤대회 풀코스 도전은 내게 삶에 대한 도전이자 반항이었고, 나를 테스트하기 위한 일종의 시험이었다. 하지만 그 때는 왠지 완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죽음의 문턱 그 앞까지 갔다 와서 그런 것일까? 죽으려는 용기로 뭐든 못 할 건 없다는 생각이었을까? 아무튼 건강을 되찾기 위해 아니 인생의 밑바닥에서 탈출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신청한 마라톤대회가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릴 줄 그 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15:07 시계바늘이 정동향을 가리키고 나서야 사우나에서 발걸음이 떨어졌다. 아직 햇빛은 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