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수요일, 여섯 번째 18:55 산업단지 길을 벗어나 국도로 접어 들었다. 시간은 어느덧 흘러 벌써 저녁 7시가 되어 간다. 주변이 어둑해져 온다. 체력이 방전된 상태에서 어두워지니까 겁이 난다. 걸으면서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다리며 허리며 몸 전체의 근육이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궁둥이 사이에 끼웠던 휴지덩어리는 고정이 안돼서 팬티 안에서 돌아다닌다. 5킬로그램의 조끼배낭은 왜 이렇게 무겁게만 느껴지는지. 게다가 국도를 달리는 차들의 속도가 장난 아니다. 도로의 갓길로 이동할 때는 차 오는 걸 마주보고 가라 했는데 맞은 편 갓길은 너무 좁아 보여서 그냥 차를 등지고 계속 달린다. 20:15 순간 좀 어두워 진다 싶더니 갑자기 온 세상에 정전이 난 듯 캄캄해 진다. 시계를..
6월 1일 수요일, 다섯 번째 까악 까악, 저기 언덕너머 까치 소리가 들린다. 오늘 보고싶은 사람을 만날려나, 그보다 하늘에서 냉수 한 바가지 똑 떨어졌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냉수 한 바가지가 눈에 나타났다. 어라 이게 왠일이냐. 왠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 와서 냉수가 가득 담긴 대접을 들고 내 눈 앞에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학생 더워 보이는데 냉수마시게. 아주머니는 빙긋 웃으면서 이상한 거 안 들었으니 어여 마시라는 듯이 내 손에 대접을 쥐어 주신다. 내가 쓰러져 있는 것을 집 창문 밖으로 보고 집에서 가져 왔단다. 감사하다는 말은 나중에 사발을 얼른 받아 한 숨에 들이켰다. 살 것 같다. 고비 때 마다 하늘에서 천사 내려 보내듯 과자주고 냉수주고 이게 무슨 조화인가. 고개..
6월 1일 수요일, 네 번째 11:39 아이들의 환호성 소리에 눈이 떠졌다. 옆에서 아빠와 함께 사우나에 온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보며 큰 소리로 웃고 있는 것이 보인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꿈을 꿔도 달리기 꿈을 꾸다니. 그래, 그 때 학교에서 오래달리기를 했었다. 몸은 약해서 잔병치레를 곧잘 하곤 했지만 오래달리기는 자신 있었다. 달릴 때는 숨이 막히고 다리가 후들거려도 멈추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 때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내가 달리는 행위에서 희열을 느낀다는 것을. 당시 반에서 제일 잘 달린다는 아이를 간만의 차로 이기고 나선 쌕쌕이란 별명이 생겼었다. 그리고는 그 달리는 희열과 느낌을 잊고 있었다. 사회에 나와 쇳 맛나는 몹쓸 병에 걸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11:..
6월 1일 수요일, 세 번째 07:08 이제 흙 길로 들어섰다. 길 양쪽 옆에는 공장 아니면 논밭이다. 해가 뜬지 얼마나 됐다고 체감 온도는 30도 이상이다. 햇볕에 달궈진 도로 열기가 아지랑이가 되어 피어 오른다. 아직 풀코스 거리도 안 왔는데 벌써부터 지친다. 길 찾는데 신경을 많이 쓴 것이 원인이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돌아가기 싫어서 지름길을 찾다가 오히려 헤매기 일쑤다. 가다가 또 막힌 길을 만났다. 갑자기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더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몇 킬로미터만 더 가면 봉담읍인데, 조금만 더 가면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데……. 아, 이게 바로 당이 떨어지는 현상인가 보다. 멈춰 서서 배낭을 풀러 초콜렛을 찾아 보았다. 아니 그런데 이런, 태양열이 초콜렛을 초코액으로 만들어 놓았다. 마실 수..
6월 1일 수요일 두번째 01:00 10킬로미터는 이동했을까. 시흥과 안양시 경계선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왔다. 그 곳에서 풀그림님이 다시 또 응원하러 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아쉬운 작별을 했다. 이제 군포를 향하여. 아리아리님과 둘이서 한참을 국도 갓길로 이동한다. 석수인터체인지를 지나고 나서 차가 쌩쌩 다니는 길보다는 안양천을 따라 가는 길을 선택했다. 아리아리님이 안내해주는 안양천 길은 한적하고 고요했다. 가끔 지름길로 이동할 때 굴다리를 몇 번 통과해야 했는데 그 때마다 그 안에서 신문지에 덮여 자고 있는 노숙자가 있어 놀라곤 했다. 하긴 그건 새벽에 뛰어다니는 우리를 본 상대방도 마찬가지였으리라. 02:00 군포 도착. 동반주를 하다 보니 오늘 벌써 20킬로미터를 이동했다. 마치 순간 이동한 느낌이..
6월 1일 수요일. 국토일주 하룻날, 서울 출발, 평택시 안중읍까지 목표경로: 서울 신길동–경기도 군포시청(20km)–화성시 봉담읍(20km)–평택시 안중읍(30km) 총 70km 2016년 5월 31일 23:50 가다가 힘들면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무리하지 말고. 6월 1일이 되기 10여 분 전, 아내는 담담하게 말을 건넸고 나는 현관문 앞에 주저 앉아 러닝화 끈을 조이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아빠 잘 다녀오세요 아들 둘은 내가 국토일주를 한다는 것이 와 닿지 않는지 졸린 눈을 비비며 고개를 꾸벅거린다. 응, 잘 다녀올게 라고 말하고 괜스레 꿀밤 한 대씩 쥐어박고는 집으로 나섰다. 신풍역까지는 뛰어서 5분 거리다. 23:55 신풍역에 도착하니 풀그림님이 혼자 기다리고 있다. 아리아리님은요, 물어..
5월 31일 화요일. 국토일주 하루 전, 불우아동 후원금 모집계좌 개설 D-day 1 이제 내일이면 국토일주 시작이다. 은행에 가서 불우아동 후원금 모집계좌를 개설하고 SNS에 내용을 공유했다. 이 계좌로 6월 한 달 동안 후원금을 받고 말일에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전달할 것이다. 후원금을 많이 모으고자 계좌를 공개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불우아동에 대해 한번이라도 생각하고 몸소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한 명씩 늘어날 때마다 그래도 이 사회가 살아갈 만하다는 걸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원래는 나 혼자 달리고 그 달림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내가 달린 거리만큼 킬로미터당 1000원씩을 불우아동 후원금으로 낼 계획이었다. 이는 작년에 출간한 보험..
5월 30일 월요일. 국토일주 이틀 전, 세부경로 확정 D-day 2 국토일주 이틀을 남기고 나서야 드디어 세부 경로를 확정했다. 물론 실제 달리다 보면 많은 변동이 있을 것이다. 충청북도가 빠진 것이 못 내 아쉬웠다. 일정상 국토를 사분면으로 나눠 경로를 잡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 출발해서 목포까지 엿새 동안 서부종주를 하고, 다시 목포에서 부산까지 닷새 동안 남부횡단, 부산에서 강릉까지 닷새 동안 동부종주, 강릉에서 다시 서울까지 사흘 동안 중부횡단으로 총 19일 동안 ㅁ자로 국토를 한 바퀴 도는 경로다. 6/1(수) 경기도 입성: 서울 신길동–경기도 군포시청(20km)–화성시 봉담읍(20km)–평택시 안중읍(30km) 총 70km 6/2(목) 충청남도 입성: 평택시 안중읍–충청남도 아산..
5월 29일 일요일. 국토일주 사흘 전, 이동 경로 고민 D-day 3 이제 3일밖에 안 남았음에도 국토일주 세부경로를 아직도 확정 짓지 못했다. 처음에는 당연하게 잡았던 코스인데 다시 보면 다른 코스가 눈에 보였다. 고치고 고치고 또 고쳤다. 실제 가보지 않은 길을 지도만 보고 코스를 잡으려니 대체 어떤 길일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상상만 해 볼 뿐이다. 국도라고 해도 주변에 상점이나 휴게소가 없을 수도 있고 기타도일지라도 산길이라 쉴 곳이 없을 수도 있었다. 도심과 도심을 연결해서 달리려고 하니 직선거리가 아닌 지그재그식으로 거리가 너무 늘어나고, 고속도로를 타야하거나 산을 타고 넘어야 했다. 그렇다고 직선 경로로 가려하니 중간에 지나칠 수 있는 도심이 없었다. 벌써 수십 번의 수정을 반복하고 있었..
5월 28일 토요일. 국토일주 나흘 전, 새로운 습관 만들기 계획 수립 D-day 4 국토일주가 이제 4일 앞으로 다가왔다. 몸을 만들지 않은 상태에서 길까지 찾아 달려야 하는 국토일주라. 생각만 해도 흥분되었다. 며칠이나 이동할 수 있을지, 극한의 상황에서 몸과 마음이 어떤 상태가 될지 전혀 예측되지 않았다. 안방에 누워있다가 문득 뭐가 생각났는지 옷을 훌러덩 벗고 팬티만 입은 상태에서 아내한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아내는 별 짓을 다한다고 창피하다면서도 여러 장을 찍어 주었다. 이 사진을 증거물로 남기리라. 사진 속의 나는 한동안 운동을 안 해서 허연 속살에 팔다리는 가늘고 배는 나와 있었다. 지금 5킬로미터만 뛰라고 해도 숨을 헉헉거릴 판이었다. 어쩌면 십 여 년 전 마라톤을 시작하기 전의 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