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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3일 금요일, 여섯 번째 

 

19:52 좀 어둡다 싶더니 어느덧 해가 떨어진다. 산 뒤쪽 하늘이 벌겋게 물들어 간다. 이럴 때는 노을이 무섭다. 이제 금방 사방이 시커멓게 될 것이다.

정신 없이 도로 따라 논두렁 따라 가다 보니 다시 산길이다. 큰일이다. 갑자기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이제 더 이상 서있을 힘도 없는데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상태에서 노숙을 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체력이 완전히 방전된 상태에서 두려움은 수 십 배로 커진다.

해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청남 초중학교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지도 앱을 켜고 현재 위치에서 청남 초중학교까지 거리를 재보니 대략 7킬로미터 가량 남았다. 평상시였으면 4분 페이스로 30분이면 뛰어갈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한쪽 다리는 병신이고 체력은 방전, 정신력은 제로다. 지금 상태로는 한 시간 반 아니 두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아니 그렇게 걸려서 청남 초중학교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숙박이 확실한 것도 아니다. 만일 한밤 중에 도착했는데 잘 곳이 없다면? ,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원래 계획된 경로에서는 청남 초중학교는 지나쳐 가는 포인트였다.

 

 

20:06 어느새 어둠이 주위를 정복해 버린다. 해가 완전히 사라졌다. 산 속이라 예상보다 빨리 어둠이 찾아 왔다.

얼른 멈춰서 헤드랜턴과 야광조끼, 야광밴드를 꺼내 야간주 복장으로 환복했다. 갑자기 공포심과 두려움이 온 몸을 휘감는다. 뛰어야 한다. 헤드랜턴에 날파리 떼가 달려들어 입으로 코로 들어 온다. 이제 길을 찾아 간다는 것도 무의미 하다. 불빛을 찾아 달리고 또 달린다. 최악의 경우는 노숙을 해야 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래도 마을까지는 가서 노숙을 해야지 이런 산길에서 노숙은 나 죽겠다는 소리밖에 안 된다. 그리고 또 아는가. 마을에 가면 민박이 있을 수도 있다.

불빛을 향해 산길을 따라 미친 듯이 달려가본다.

 

20:18 숨이 가쁘다. 온 몸의 글리코겐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에서 산길을 미친 듯이 달렸더니 숨이 턱턱 막힌다. 불빛이 있는 곳에 가면그저 가로등이고 다시 불빛을 향해 길 따라 달려가면 또 가로등이다. 거친 숨에서 쇠 맛이 난다. 이건 피 맛이다. 목구멍에서 피가 솟구쳐 나올 것만 같다. 피를 토하는 그 느낌. 그래 나는 이 맛을 안다. 13년 전 맛보았던 그 맛이다.

 

 

한일월드컵이 있고 그 다음 해, 영업을 시작하고 두 번째로 맞는 겨울은 그저 외로왔고, 햇살은 그저 창백하기만 했다. 담배가 유일하게 나를 위로해 주는 친구이며 유일한 취미였다. 담배를 피울 때마다 나오는 마른 기침과 누런 가래의 불편함만 빼면 말이다. 뼈 속까지 시린 날이었다.

 

입사한지 1년 여가 되어 가는데 매달 무가동이자 자뻑의 연속이고 경제적으로 파산 직전에다 정신적으로 공황상태, 체력적으로 말기환자였다. 그 날 따라 담배를 피우면서 요즘 부쩍 잔기침을 많이 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절기 때부터 따라다닌 감기가 나을 듯 나을 듯 하면서 찬 바람이 불수록 더욱 심해졌다.

진눈깨비와 함께 매서운 바람이 불던 어느 날, 이번 달 처음이자 마지막 남은 상담 건이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 맞은편에 망부석처럼 앉아 있는 가망고객은 내 말을 알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건지, 하겠다는 건지 안 하겠다는 건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제안서만 들어다 보고 있다. 내 말은 의미 없는 메아리가 되어 허공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신경이 쓰이는 건 설명 도중 계속 목구멍에서 치밀어 나오는 기침이었다. 제안서를 설명해야 하는데 계속되는 기침으로 말을 못 이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무엇보다도 기침과 함께 목에서 무언가가 나오는 듯한 느낌이 석연찮았다.

 

심드렁하게 쳐다보고 있는 가망 고객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충 서류를 접어 가방에 넣고 빌딩을 빠져 나왔다.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차갑다 느껴졌다. 또 다시 사래가 크게 걸린 마냥 허리를 기역자로 꺾은 채 기침이 시작되었다. 가로수를 부여잡았다. 어찌나 심하게 기침을 해댔는지 눈물과 콧물, 침 같은 걸쭉한 액체가 범벅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아니 그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빠알갛다. 내 입에서 나오는 게 피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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