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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3일 금요일, 일곱 번째

 

20:26 그래 그건 피였다. 새빨간 피. 나는 그 때 그 시큼한 쇠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 또 다시 피를 토한다 해도 아마 놀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숨이 너무 가쁘다. 온 몸의 철분이 숨통을 통해서 다 빠져 나간 느낌이다. 지금 내 피를 검사해 보면 헤모글로빈에 철 성분이 하나도 없겠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철 성분이 없어 죽을 수도 있을까? 머리가 어지럽다. 다리가 휘청거린다. 이제 달리는 건지 걷고 있는 건지 구분이 안된다.

 

20:54  저 멀리 불빛이 보인다. 이번에는 불빛이 모여 있다. 지금까지 보았던 불빛과는 다르다. 지도 앱을 보니 요 근처가 청남 초중학교로 나오는 것이 이제 다 왔다 보다.

이를 악물고 다시 달린다. 거의 깽깽이 수준이다.

저멀리 마을이 보인다. 집들이 보인다. 그런데 너무 고요하다. 불이 모두 꺼져 있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볼까, 개가 짖어대면 어떻게 하지,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려 봤다. 인기척이 없다. 사람이 안 사는 집인가? 더 무서워졌다. 아니 마을 자체가 사람이 안 사는 마을인가, 아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걸을 힘조차 없다. 이제 틀렸다. 그냥 여기에 눕자. 죽든 말든 서있는 고통보다 누워 있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무너진 하늘에서 솟아날 구멍을 찾은 건 그 직후의 일이다.

20:58 헤드랜턴에 의존해 누울 곳을 찾아 조심 조심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부르릉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이 놀래라. 정말 깜짝 놀라서 소리 나는 곳을 쳐다봤더니 트럭이 바로 옆에 있었고 운전석에 사람이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성큼 다가가서 창문을 두드렸다.

아니 이 밤중에 무슨 일이여?

눈이 휘둥그래진 한 아저씨가 창문을 내리고는 뭐여 대체 하면서 머리를 내민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무엇을 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봇물 터지듯이 쏟아놓고는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저씨한테 마을에서 숙박할 수 있는 집을 찾아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옆에 친구 집에 와서 술 한 잔하고는 트럭 안에서 한참을 자다 보니 한 밤중이 됐다며 이 마을에는 잘 데도 없고 자기가 잠 잘 수 있는 데까지 태워주겠다고 한다.

앞 뒤 잴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말하고 얼른 조수석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마을을 빠져나가는데 어라 내가 왔던 길을 다시 돌아 간다.

? 아저씨, 숙박이 가능한 곳이 어디인데요?

여기서 가장 가까운 시내는 공주나 부여인데 부여보다는 공주로 가는 게 더 낫다면서 어두운 산길을 냅다 달린다. , 몇 시간 동안 다리를 절며 기어온 길을 몇 분만에 되돌아 가다니.


21:02 얼마나되돌아 갔을까? 순간 주위가 환해지면서 읍내에 들어 왔다. 여기가 어디일까? 아저씨가 말해 줬는데 기억이 안 난다. 빽도를 한 것이 아깝다는 생각과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이 한데 섞여 묘한 감정이 온 몸을 휘감았다. 아저씨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골목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모텔이 있을 거라며 얼른 가서 푹 쉬라고 말해줬다.

아저씨 정말 감사합니다. 어떻게 감사하다는 표현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보니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손에 잡힌다. 얼른 꺼내어 아저씨에게 내밀었다.

아저씨 혹시 담배 피우세요? 담뱃값이라도 드리고 싶어요. 이거 받으세요. 제가 국토일주 중이라 현금이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너무 감사합니다. 대대로 복 받으세요.

 

 

하지만 아저씨는 한사코 사양하면서 됐다며 말 한 마디를 던지고 트럭을 돌려 그냥 가버렸다. 우두커니 서서 멀어져 가는 트럭을 보는데 아저씨의 마지막 말 한 마디가 귓속을 맴돈다.

힘들어도 웃어요. 하나님도 웃는 사람을 좋아한다니께.

위기 때마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 구사(九死)가 일생(一生)이다.

오늘도 항상 그랬듯이 수호천사가 왔다 갔다. 아무튼 살았다. 어디든 들어가서 밥 좀 먹고 목숨을 부지해야겠다. 그리고 그 트럭 아저씨 말 따나 웃자. 오늘도 무사한 하루를 보냈으니 말이다.

 

21:10 서울이나 지방이나 눈에 제일 먼저 띄는 음식점이 뼈다귀 해장국집인듯하다. 마침 그 건물 옆으로 골목 끝에 여관도 보인다. 음식점에 들어가니 넓은 홀에 연인들 한쌍과 젊은 친구들 무리가 보인다. 국밥을 시켰다.

구석에 아무렇게 구겨 앉아 있는데 온 몸이 물먹은 스폰지가 따로 없다. 금방 나온 국밥을 입에 털어 넣었다. 꿀맛이다. 하지만 너무 지쳐서 그런지 절반가량 먹으니 더 이상 입에 들어가지 않는다. 눈이 감긴다. 몸만 무거운 게 아니라 눈꺼풀도 무겁다.

 

 

22:50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여관방이고 나는 누워있다. 마치 자동항법이 작동한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여관방안까지 들어와서 침대에 드러누웠구나.

아, 이렇게 매일 퍼져서야 과연 일정대로 국토일주를 할 수 있을까? 이공이공님이 광주에서 목포까지 동반주를 하겠다고 연락왔었는데 내가 이렇게 달려서는 광주에서 목포를 들러서 순천까지 도저히 갈 수 없다. 이공이공님한테 문자를 보냈다.

몸상태가 너무 안 좋아 이동 구간을 하루 줄여야겠습니다. 광주에서 목포를 갔다가 순천을 가지 않고 광주에서 바로 순천으로 이동하는 경로를 알아봐 주실 수 있으세요.

 

22:55 문자를 보내고 나니 졸음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다. 옷은 벗고 자야 하는데……샤워는 해야 하는데…… 양치는 해야 하는데…… 빨래는 해야하는데……, 자기 전에 해야 할 것들이 머리 속에서 메아리 치는데 몸이 움직여 지지 않는다. 젖은 솜이 되어 이불 위에 달라붙어 떨어지지가 않는다. 몸이 정신이 깊은 수렁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이 서른 한 살에 폐결핵이라니. 길거리에서 가로수를 부여잡고 기침할 때 입에서 나오는 새빨간 피에 식겁을 했다. 후진국에서나 걸릴 법한 낯선 병에 걸린 것이다.

의사는 면역력이 아주 현저히 떨어지면 걸리는 거라고 완전히 완치하기 위해서 최소 6개월은 약을 계속 복용해야 한다고 그랬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쉬지는 않으면서 불규칙한 식사 그리고 밤마다 음주와 줄기찬 흡연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실적과 그로 인한 소득의 불안정함에 따른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더 컸으리라.

집에 미안하고 더군다나 나 자신에게 쪽 팔렸다. 어떻게 하지. 생각이 멈췄다. 무엇을 해도 안 되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책임져야 할 식구가 두 명이나 있다. 결혼한지 이제 4년 차, 세 살 배기 아이는 나와 똑 닮았다. 하지만 지금 나의 모습은 아빠라고 하기에도 가장이라 하기에도 너무나 모자란 모습이다. 영업한다고 가진 것없이 빚만 한가득이라니.

지금의 내 처지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닭 똥 같은 눈물이 주룩 주룩 쏟아지는데 도저히 멈춰지지 않았다.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그저 분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3일차 경로: 아산시 송악면-공주시 유구읍(20km)-청양군 청남 초중학교 근방(30km) 50km

 

 

"이 세상 어디를 봐도 기회는 어려움 속에서 만들어 진다."

넬슨 록펠러 (Nelson A. Rockefeller, 기업가)

우리가 처음에 생각한 데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낙담하기 쉽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임법칙은 난관 속에서 기회가 잉태된다는 규칙이 있다. 그래서 고난을 도전이라 생각하고 감사해야 한다. 그 순간 우리는 아이디어, 혁신, 기회라는 우선권을 갖게 될 테니까 말이다. 힘든 시기가 없으면 변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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