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4일차④ 충남논산강경읍] 이제 전북 익산으로

 6월 4일 토요일, 네 번째

 

16:37 이제 익산으로 간다. 한 낮인데도 비가 오니 더위 걱정은 없다. 땡볕 때문에 고생할 일은 없는 셈이다. 이 정도 날씨라면 30킬로미터쯤이야 뭐. 비가 계속 추적 추적 내린다.

 

 

아, 내 종이지도. 배낭 뒤 바깥 주머니에 꽂아 놓았던 종이지도가 꽤 많이 젖었다. 배낭이 꽉 차서 안쪽에 못 넣었는데 생각을 못 했다. 젓갈 가게 길을 지나가다가 비닐봉지 하나 얻어서 종이지도를 감싸서 젖지 않도록 하고 다시 출발했다. 그칠 비가 아니다. 하지만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나는 간다.

 

 

17:55 지금 한 시간 반 동안 비 속을 뚫고 달리고 있다. 신발 속이 질퍽해져서 딛일 때마다 퍽퍽거리는 느낌이 영 좋지 않다. 비가 와서 그런지 국도에 달리는 차들의 속도가 더 빠르게 느껴진다. 문제는 머리에 비를 안 맞기 위해 후드를 쓰면차가 오는 소리가 빗소리와 발자국 소리에 섞여 잘 안 들린다는 것이다. 위험했다. 게다가 지도를 보니 국도를 따라 용안면을 거쳐 가면 너무 돌게 된다.국도에서 빠져 나오자. 국도에서 나와서 용동면의 논밭과 들판을 가로지르기로 했다.

 

 

핸드폰이 켜졌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가민시계에 있는 나침반을 보면서 방향에 맞춰 이동한다. 충청도는 작은 산도 많지만 도심과 도심 사이는 거의 논밭이다. 가도 가도 논밭이다. 그런데 이런, 하천 하나가 갈 길을 가로막는다. 산북천이다. 다리가 어디 있나 검색해 보니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 나참, 국도를 따라 돌아가나 똑같아 졌다.

그래 인생에서 때로는 빠를 거라 선택한 길이 오히려 더 돌아갈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하랴. 낙담하고 후회만 하고 있을 것인가, 다시 계획을 세워서 나아가야 한다.

선택을 하고 선택을 한 것에 후회하지 말고 순간에 집중해서 즐기면 된다. 순간 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그 것이 내 인생이다.

 

 

17:55 논밭을 따라 한참을 가다 보면 가끔 마을을 통과할 때도 있다. 그런데 항상 조용하고 마치 사람이 안 사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왜 그럴까 궁금했었는데 이내 곧 알게 되었다.

시골에서는 농번기(農繁期) 때는 할 일이 많아 마을 모든 사람이 동원되어 논밭 일을 하는데 그렇지 않은 이상에야 그리 집 밖으로 나올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핸드폰으로 농번기를 검색해 보니 보리, 밀 등의 하곡(夏穀)수확과 이앙기(移秧期)가 중첩되는 6월 중순부터 7월 중순, 그리고 추수(추수)와 백경기(맥경기)가 겹치는 10월이라고 하니 지금은 농한기(農閑期)인 셈이다.

지금은 사람이 할 일은 없고 자연이 한 몫 하는 때였다. 강렬한 태양빛과 거센 비바람, 퇴비를 가득 품은 토양의 몫이었다.

무럭무럭 자라라 자식들. 올 한 해 풍년 되게 해주세요. 나 혼자 논밭과 하늘을 두루 보며 기도하며 달린다.

 

18:26 비가 어느새 멈췄다. 해가 산자락에 가까이 내려 앉으니 햇빛이 노오란 것이 온 세상이 황금빛이다. 모든 사물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시골 마을의 골목길이 너무도 평온하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60년대로 돌아온 느낌이다. 골목길이 끝나면 논밭 논두렁길이고 한참 이동하면 또 마을 골목길이다.

이번에는 기찻길 건널목을 만났다. 간판을 보니 화정건널목이라고 써져 있는데 그 풍경이 매우 이국적이다. 어디 유럽 어느 옛 도시의 기찻길을 뚝 떼다가 가져다 놓은 것 같다. 발 딛는 거리, 길, 마을마다 새롭다. 이토록 아름다운 강산을 이제서야 느껴 보다니.

 

 

 

 

18:37 논밭 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 보니 국도와 마주쳤다. 바로 길 건너 도시다. 아 여기는 어디인가? 도로 이정표를 보니 함열읍이다. 반갑다. 빨리 쉬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다. 식당에 가서 드러눕고 싶다. 배도 고프고 정말 심신이 피로하다. 읍내만 돼도 마을과는 풍경이 사뭇 다르다. 읍내에는 편의점도 있고 식당도 있고 어디는 마트까지 있다.

 

 

 

18:49 신발 벗고 앉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저녁시간이라 음식점에 손님이 붐빈다.

가정식 백반을 시키고는 평상에 올라가자 마자 양말 벗고 마사지를 한다. 발가락 물집은 어느새 다 터져서 감각이 무뎌졌는지 이제 아프지가 않다. 흉하게 됐지만 그거야 뭐,발목이 너덜해진 게 문제다. 이상케도 장경인대나 무릎은 별 탈이 없는데 이놈의 발목과 발바닥이 심상치 않다. 양쪽 발목 인대와 아킬레스건 그리고 족저근막에 염증이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내일 정도에는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

장거리를 쉼 없이 이동하니 다리가 지치는 건 물론이거니와 허리와 등도 피로가 쌓인다. 힘들다고 이동할 때 허리와 등을 구부리게 되거나 앉아있을 때 잘못된 자세를 취하면 그것이 쌓여 엄청난 통증을 가져온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있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18:55 키네시오 테이핑을 다시 하고 물도 채워넣고 핸드폰과 예비배터리도 충전하며 부산을 떨고 있는데 음식이 나왔다. 그런데 밥 한 공기가 더 딸려 나온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아줌마가 서비스란다. 국토일주 부착물 보고 고생 많다고 주는 거니 많이 먹고 힘내라고 한다. 인심 참 좋다. 그러더니 또 물어본다.

자전거는 어따 뒀어요?

아 자전거 안 타고 왔어요. 저 뛰어 왔어요.

어디서 왔냐는 물음에 서울에서 왔고 지금 4일차라는 말에 식당 아줌마들이 까무러친다. 다들 국토일주한다고 하면 자전거로 하는 걸로 아는데 아마도 요즘에 자전거로 국토일주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어찌되었든 좋은 일이다. 우리나라 이 강산 이 국토를 그렇게 느껴봐야 한다는데 한 표를 던진다.